"제주 보리와 고급 호프로 풍부한 맥주 맛 살렸죠"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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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물 좋기로 정평이 난 제주도. 제주특별자치도가 이 깨끗한 암반수를 이용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제스피’라는 고유 브랜드의 제주 맥주를 24일 출시한 것이다.

 제스피의 탄생 뒤에는 스페인 출신 ‘맥주 달인’ 보리스 데 메조네스(51·사진)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메조네스는 독일에서 맥주 양조법을 정통으로 배운 ‘마이스터(장인)’다. 세계적인 맥주 경연장인 ‘유럽비어스타’ 대회에서 2011·2012년 연거푸 은메달을 땄다. 또 2010년 호주 맥주대회에서 동상, 올해 3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비어컵’에서는 은상을 탔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급 맥주 장인인 셈이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제주시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보리스 브루어리(Boris Brewery)’라는 아담한 ‘브루펍(brew pub·직접 만든 맥주를 파는 술집)’을 경영하고 있다.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만드는 최고급 맥주인지라 인터넷을 통해 그의 가게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제주에 오는 외국인 중에 이곳을 알고 찾아오는 손님이 꽤 많다”는 게 메조네스의 귀띔이다. 손님이 몰려서 좋기는 하지만 그는 저녁이 되면 종업원과 함께 서빙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세계적 맥주의 대가가 한국의 서울도 아닌 제주에까지 흘러들어온 사연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사랑 때문이었다.

 메조네스는 스페인에서 나서 자랐지만 맥주의 본고장 독일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아버지가 스페인인이었지만 어머니는 독일 출신”이라면서 “어릴 적부터 1년에 여름방학 3개월씩은 외가에 가서 지냈기에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다. “아버지와 형을 비롯해 친척 중에 유독 건축가가 많아 나 역시 건축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러나 얼마 안 가 적성과 맞지 않는다고 깨달은 그는 건축 공부를 접고 군대에 입대한다. 그는 “모험심 많은 성격이어서 공수부대를 자원했다”며 웃었다. 실제로 남다른 모험심 탓에 그는 모터사이클도 즐겼다. “22세 때에는 스페인 주니어 모터사이클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고. 2년의 거친 군생활 후 그는 대학은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마드리드자치대(Universidad de Autonoma de Madrid)에 들어가 이번에는 경제학을 전공한다. 그러곤 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 노팅엄대로 유학, 경영학석사(MBA)를 땄다. 많은 MBA 출신이 그렇듯 메조네스가 택한 길은 금융인이 되는 것이었다.

 4년간 영국 런던에서 잘나가는 은행원이었던 그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건 우연이었다. “어느 날 동네 잡화점에서 맥주제조키트를 사서 집에서 술을 빚어봤는데 그렇게 맛이 좋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후 메조네스는 맥주 양조가 자신의 천직임을 깨닫고 중대 결심을 한다.

“은행원을 집어치우고 정식으로 맥주 양조법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맥주의 본고장인 독일 베를린의 양조학교(VLB)에 진학해 1년 만에 마이스터 자격을 땄다. “그때 독문학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한국에서 유학 온 지금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2003년 결혼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국인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린 그에게 어느 날 서울에서 공부할 기회가 찾아온다. 유럽연합(EU)이 한국과의 교류증진을 위해 마련한 6개월 연수프로그램에 선발된 것이다. 그리하여 메조네스는 “아내와 막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2004년 한국에 왔고 결국 아내의 고향 제주에 정착하게 됐다”고 했다.

제스피 맥주 ‘스타우트’

제주에 온 그가 잘할 수 있는 건 역시 최고의 맥주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2006년부터 처남과 함께 제주 시내에서 ‘모던타임’이라는 브루펍을 열었고 1년 뒤인 2007년 독립, 중심가에서는 떨어진 한적한 거리에 보리스 브루어리를 개업하게 된다. 이 무렵 메조네스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가족과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었다”고. 그러나 세상은 맥주의 달인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도 산하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JPDC)에서 향토 맥주를 개발키로 결정하고 2010년 메조네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제주도의 맥주 프로젝트는 이 지역의 유명한 화산암반수를 활용하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제주도 섬 전체에 분포돼 있는 화산암반층은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 때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 덕분에 제주도 지하수는 전국 어디보다 깨끗하고 미네랄 성분도 풍부하다.

 JPDC는 이런 천혜의 자원을 이용, 그간 ‘삼다수’라는 생수와 감귤주스 등의 제품화에 성공했다. 이 기세를 몰아 이번에는 맥주 산업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JPDC는 제주도 밖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하고 맛있는 맥주를 만든다는 목표 아래 4명의 연구원으로 된 개발팀을 짰다. 여기에 메조네스는 특별자문역으로 초빙됐다. 연구원들은 대학에서 생명공학·식품공학 등을 전공한 전문인력이었지만 맥주 양조 자체에 대해서는 문외한들이었다. 그랬기에 메조네스는 보리·호프 등 재료 구매에서부터 발효 등 제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일일이 챙겨야 했다. 그는 “제주도의 맥주 사업이 백지단계에서부터 출발했기에 풀타임으로 일해야 했다”고 술회했다.

 결국 2010년 10월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제주 맥주는 근 3년 만에 ‘제스피(Jespi)’라는 브랜드로 탄생하게 된다. 개발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때로는 발효 온도가 맞지 않아, 어떤 경우엔 정전 때문에 수백L의 맥주 원료를 버려야 했다. 그럼에도 부단한 노력 끝에 깔끔한 물맛과 향토 보리 맛을 살린 제스피가 탄생하게 됐다.

 제스피는 제주(Jeju)와 정신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스피리트(spirit)’를 합친 것이다. 즉 ‘제주의 혼’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제스피는 각자의 입맛에 맞게 생맥주 같은 ‘필즈너(Pilsner)’에서 약간 더 강한 ‘페일 에일(Pale Ale)’, 강한 맛의 ‘스트롱 에일(Strong Ale)’, 그리고 흑맥주 스타일의 ‘스타우트(Stout)’까지 모두 네 종류가 출시됐다.

상표에는 제주도의 상징적 동물인 말 형상이 인쇄돼 있다. 일단 도내에서만 파는 향토 맥주로 시작해 일본의 삿포로 맥주, 중국의 칭다오 맥주처럼 한국은 물론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국제적 명품으로 키워가겠다는 게 제주도의 야심이다. 제스피의 산파인 메조네스는 “독일 맥주 본연의 풍부한 맛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며 “이를 위해 가급적 품질 좋은 호프와 제주산 보리를 썼다”고 했다.

 그는 한국 맥주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거침없이 털어놨다. 그는 “세간의 혹평만큼 한국 맥주가 형편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 훌륭하지도 않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한다. 그 이유를 묻자 “맥주에 부과되는 엄청난 세금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한국 맥주에는 10%의 부가가치세 외에 주세 72%에다 교육세 30%까지 붙는다.

이렇게 세금이 많은데도 맥주 값이 싸다 보니 다른 외국산처럼 고급 재료를 쓸래야 쓸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현 한국 세법상 재료비가 많이 들수록 세금이 올라가는 구조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독일처럼 원가와는 상관없이 맥주 양에 따라 세금이 매겨지면 비싸고 좋은 재료를 훨씬 쉽게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메조네스의 주장이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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