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물리학상-그 영광과 그늘|전 물리학자 미첼 윌슨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줄리언·슈윙거」가 1935년 「컬럼비아」 대학에 물리학 교수로 피명 돼 왔을 때 그는 17세의 애송이었다. 나를 포함한 4명의 최연소 교수 「그룹」중에서 최연소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65년에 「슈윙거」는 전력학 연구로 「노벨」상을 탔다. 「I·라비」가 44년에, 「P·커쉬」가 55년에, 그리고 「W·램」이 그 뒤를 이어 「노벨」상을 받았다. l만명이 넘는 당대의 물리학자 중에 이같이 내 주위에서 영예를 차지하고 보니 「노벨」상외 이면이 빤히 드러난다.
내가 처음 만난 「노벨」상 수상자는 「엔리코·페르미」였다. 그는 38년에 수상이 결정되자 가족과 함께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뭇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를 떠났다.
「페르미」는 수상식이 끝나자 행선을 미국으로 돌렸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 정착했다. 나는 그의 조수가 됐는데 내가 받은 인상으론 그의 물리학은 머릿속으로 보다 몸으로 먼저 왔다. 「페르미」는 「노벨」 상금으로 운동 기구를 사들였다. 등산에 남보다 뒤지기를 싫어했고 테니스·수영을 대단한 인내심으로 해내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그의 방법으로 그 자신에 의하여』 해치우는 성미였다. 핵분열의 발견은 「페르미」의 그같은 「자신에의 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창조력의 화신이었다. 「페르미」를 비롯한 몇몇 수상자는 「알프레트·노벨」의 유지에 알맞는 업적을 쌓았다. 「X레이」를 발견한 「뢴트겐」은 여자들의 겹켭으로 된 옷을 뚫고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없을까하는 생각을 품었다.
은행의 철고를 들여다보고 싶은 은행 「갱」의 심경을 상상해봤다. 마침내 그는 「X레이」를 발견해 내어 하루아침에 마법사가 됐다. 그는 1901년 「노벨」상 수상 1호가 됐다. 하지만 「노벨」 수상자들은 비범한 사람들이다. 평생에 5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보통 과학자들보다 적어도 20배 내지 40배의 생산성을 낼만큼 창조력이 있다고 본다. 수상자들은 5편 정도야 1년에 써낼 수 있다. 그러나 통계에 따르면 일단 수상하고 나면 연구 진도가 축 처지다.
수상과 함께 일약 명사가 돼 여기저기 초청에 끌려 다니다 보면 실험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맛이 안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수상하고 나면 더 이상 바득바득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미 최고봉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당신이 만일 「스톡홀름」으로부터 수상 전보를 받는다면 어떻겠읍니까』라고 「T·D·리」 박사에게 물었더니 30고개를 이제 막 넘은 중국계의 이 박사는 『제기랄, 나머지 생애를 어떻게 보낸담』하고 대꾸했다. 「노벨」상에 그처럼 초연한 사람도 있지만 슬픔을 안겨다주는 사례도 있다. 「메길」 대학의 삼총사 「램지」 「러더퍼드」 「소디」 세 박사는 방사능 이론 개척의 태두였다. 그중 「소디」가 「리더」격이었다. 그러나 「램지」가 1904년, 「러더포드」가 그 뒤를 이어 수상하자 「소디」는 실의에 빠졌다. 「소디」는 『내가 그들을 가르쳐야 될 사람인데…』라고 투덜댄 끝에 20년 뒤에 『「스톡홀름」의 전보』를 받았다. 【어틀랜틱지에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