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여 석 기 <고대교수>|동인극단 대량등장|연출·연기등 성과부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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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0년대 후반의 연극의 침체상은 우심한바가있었다. 그 침체를 뚫고서 신풍을 도입코자한 시도의 하나가 바로 젊은이들의 동인극단「제작극회」였었다. 이「그룹」은 금년에 재기했지만 60년대의 거의대부분을 활동하지못한채침체되어왔는데 그활동기의동인들이 거의모두가 지금은 한국연극의 장년층을이루고 있다는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역사적의미를갖는다.
다시말하자면 이 극단은 60년대한국연극의 주류를이룬 이른바 동인극단들의효시가 되는 것이다. 『실험』『동인』『민중』『산하』『자유』『광장』『가교』『여인』등 현재까지 60년대의 주요한 부분을활약해온극단들은 바로 이러한 동인극의 모임이었고 그들의 젊음과 패기가 때로는 이시기의한국연극을 불안정하고 직업성이희박한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으나 반면에 활기와 다양성과 얼마간의모험까지도 프함, 60년대의 한국연극은 곧이들 동인제극단의 활동의 기록으로서「커버」된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에 50년대의 주역이었던『신협』도 재기했고 국립극단 50년대후반에비해 현저하게활동적이었고「드라마·센터」를 거점으로한 연극도 특기할만하나 지난10년을 통틀어볼 때 일단 세대교체는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것같다.
「레퍼터리」면에서볼 때 특기해야할 점은 전반의 번역극우위가 후반에와서 창작극으로 전환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로서는 몇가지 요인을 들수 있으나 아무튼 한국연극이 60년대 후반이후에와서 젊은 극작가들을 배출하기 시작했고 각 극단이 매우 의식적으로 창작극 공연을 강조했다는 사실은 증요한 뜻을 지닌다.
그러나 가장 기대를 걸었던 연기 및 연출의 인재배출은 젊은 극단의 활동이 괄목할 만큼은 이뤄지지 못했고 60년대의 한국연극이 거의 새사람들에의해 공연되어졌다하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는아니었다.
공연장의 면에서볼 때 60년대는 50년대말에 소극장운등의 요람이었던 원각사의 소실에서시작하여 국립극장의 문공부이관에 의한 재발족과「드라머·센터」의 재발족이라는 두가지기획기적 사건이 있었다. 불행하게도운영면에있어항상 적신호를 경계하면서도 50년대에 비할진댄 비교되지않을만큼의 연극활동을 지속할수 있었다. 그점은 한국연극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 아닐수 없었다.
60년대에 연극계는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해왔다.
그 논의점들이 거의 아직도 해결을 보지못한채있지만 그러나 하나의 결론은『연극은 결코 죽지도사라지지도 않을 것이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은연극을 더 많은 관객앞에서 보여줄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대견스런 10년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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