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5명 중 1명 평생 고통 초기부터 세심히 심리 치료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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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호 01면

“사고 상황이 머리를 스치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멍하고 계속 머리도 아픕니다. 잠을 자다가 놀라서 중간에 자주 깨게 되고요….”

마음의 흉터, 대형사고 트라우마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의 피해자 김모(42)씨를 서울 보라매병원에서 만난 것은 사고(한국시간으로 7일 오전) 사흘 뒤인 10일. 당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사고 비행기를 탔던 회사 동료 5명과 함께 귀국해 입원한 그는 간호사가 혈압을 재는 동안에도 한숨만 내쉬었다.

동료 한모(57)씨도 “외상은 괜찮아졌는데 잠을 못 자고 심한 두통과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들은 사고 현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착륙할 때 평소와 다른 심한 충격이 가해졌다. 한씨는 잠깐 정신을 잃기도 했다. 산소 마스크가 떨어지고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 5명은 정신적 충격이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는 의료진의 권유로 함께 상담을 받기로 했다.

같은 날 오후 신촌세브란스병원.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를 겪은 두 명의 환자는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했다. 환자 김모(23·여)씨의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와 인천공항에 착륙할 때 ‘또 사고 나는 것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고 해요. 지금도 오래 서 있지 못하고 한 가지 일에 신경을 못 써요”라고 전했다.

아시아나항공 OZ214편의 샌프란시스코공항 충돌 사고 발생 일주일째다. 사망자가 3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13일까지 77명의 한국인 승객 중 31명이 귀국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에게 고통은 이제 시작이라는 게 정신과 전문의들의 설명이다. 사고기 탑승자들 중 상당수가 심한 충격과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초기에 적절한 대응이 없을 경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로 발전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PTSD의 흔적은 오래간다. 윤모(53·여)씨는 10년 이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2002년 4월 15일 경남 김해시 지내동 돗대산 정상에 중국 국제항공공사(CA) 129편이 추락했다. 윤씨는 한국인 111명 등 129명이 숨진 이 대형 사고에서 살아남은 38명 중 한 사람이다.

“직장 동료가 TV를 틀어주는데, 반쯤 부서진 비행기를 보는 순간 온 몸에 힘이 쫙 빠졌어요. 이후 사흘을 앓아 누웠죠. 온몸이 아팠어요.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사고 당시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어요.”

윤씨에게 아직도 마음의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있고, 마음이 아프면 몸도 따라서 아프다.

항공기 추락 같은 대형 사고는 당사자와 그 가족, 목격자들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자연재해나 범죄 희생자도 마찬가지다.

최태산(동신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전국재난심리지원연합회 회장은 “사고 초기는 물론 일정 기간 동안 세심하게 살피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PTSD가 만성화하면서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지진 등 자연재해가 잦은 일본은 대규모 조사를 바탕으로 2003년 1월 ‘재해 시 정신보건 의료활동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수치가 있다. 대형 재해 시 관련자의 PTSD환자 비율은 사고 3개월 후 38%에서 천천히 감소해 사고 6개월 후 20% 정도가 된다. 그런데 20%라는 이 비율은 1년째는 물론 그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다섯 명 중 한 명은 계속 상처를 안고 산다는 얘기다. 보건복지부의 ‘2011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평생 PTSD 증상을 겪는 사람은 57만 명(1.6%)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대형 재해나 사고·범죄 피해자를 초기부터 세심하게 치료하고, 보상 등 법적 절차가 끝난 이후에도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관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PTSD에 대한 민간보험 확대, 정신과 치료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는 익명치료제 도입 등의 요구도 나온다.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정신과 박용천 교수는 “장기적으로 국가 차원의 전담 조직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관계기사 6~7p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교통사고·재난 등 충격적인 사고를 겪은 뒤 앓게 되는 정신적 질환으로 사고 기억의 재생, 불안장애, 공황발작, 분노 등의 증세를 보인다. 심한 경우 사회 생활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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