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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에 없는 ‘망각의 땅’에서 논밭 갈며 살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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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호 24면

인민학교 2학년 때 터진 6·25로 고향을 떠나 수원서울을 전전하다 37년 만인 1988년 횡산리로 돌아온 이용섭씨. 20만㎡(6만 평) 부농인 그가 인부들과 새참을 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눈에 안 보이면 잊고 살기 쉽습니다. 세상없이 그리운 것도, 제아무리 무서운 것도 안 보면 마음에서 멀어지죠. 비무장지대(DMZ)가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라면 DMZ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지요. 우리가 짐 져온 병역의무도, 대륙인이면서 섬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일상도 모두가 DMZ의 영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DMZ를 망각하고 삽니다.

정전 60년 - 千의 얼굴, DMZ<끝> 민통선 마을 통신

민통선에는 지도에만 나와 있고 실제로는 지워져버린 마을들이 수두룩합니다. 모두 DMZ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방한계선(NLL)을 괴물이라고 표현했던가요. 사람들이 대대로 터 잡고 살아온 마을들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DMZ야말로 ‘괴물 지우개’ 같습니다.

인간은 기억에 사는 존재입니다. 기억은 우리를 ‘영원한 현재’에 묶어놓는 끈입니다. 그런 기억과 역사는 동의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말에 가깝습니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하나의 표상일 뿐이며 심지어는 숱한 기억들을 내몰고 재구성한 산물이니까요.

민통선 마을로 가는 길은 역사를 거슬러 사라진 기억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빗길을 헤치며 북으로 달립니다. 문득 취재차량 내비게이션에서 지도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보던 지도 역시 공백 지대입니다. 머릿속도 덩달아 새하얗게 지워지는 느낌입니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채 한 시간도 달리지 않았는데 맞닥뜨린 이 막막함이라니. 길을 모르는 이방인으로서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삶의 터전 지우는 ‘괴물 지우개’ 같은 DMZ
여기는 민통선 마을 입구. 전쟁의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으로 점철돼 온 삶의 전선입니다. 이런 데서는 여간해선 못 살 것 같지요.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을 막장인생이라고 하던가요. 이래저래 남방한계선 철조망 근처까지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남침용 땅굴까지 가까이 있으니까 영락없이 막장이나 다름없을 거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지난 10일, 제1사단 공보장교의 안내를 받아 파주시 문산읍 통일대교를 건넜습니다. 경기도 내 4개 민통선 마을 가운데 통일촌해마루촌대성동 이렇게 3개 마을이 통일대교 북쪽에 있답니다. 예전에는 장단군에 속했지만 지금은 파주시 관할이지요. 대성동 마을은 북쪽 깊숙이 더 들어가 DMZ 안에 있는데 출입허가를 받지 못해 가볼 수 없었습니다.

통일촌은 장단콩 축제로 유명합니다. 1913년 농촌진흥청 권업모범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콩 장려 품종으로 결정된 품종이 바로 ‘장단백목’이므로 장단콩의 원산지가 되는 셈입니다. 이 지역은 일교차가 크고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라서 콩 재배지로 맞춤하다고 합니다. 예부터 개성인삼을 캐고 난 뒤, 비탈 밭에 콩을 심어왔다는군요. 통일촌에는 현재 140가구 480명의 주민이 산답니다. 주로 벼, 콩, 고추 농사를 짓는데 평균 6만6000㎡(2만 평)가량을 경작한다고 하네요. 제법 많은 농사를 짓는 거지요.

해마루촌은 통일촌에서 동쪽으로 10㎞쯤 더 들어가, 임진강가에 높은음자리표 꼴로 조성한 마을입니다. 60가구 170명의 주민이 사는데 별장촌 같은 느낌을 줍니다. 집값도 평균 3억원대라고 하네요. 한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울 수 있지만 그 밖의 가축은 기르지 않기로 정했다네요. 쾌적한 생활환경을 위해서랍니다.

해마루촌에서 밭일하는 농부를 만났습니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정주호(90) 할아버지. 이 마을 바로 북쪽에 있는 하포리 출신이랍니다. 하포리는 의성(醫聖) 허준의 묘가 있지요. 1991년에 발견되어 찾는 이들이 꽤 됩니다.

“일제 말기, 면서기 밑에서 양잠지도원을 하다가 49년 스물일곱 살 때, 특무대에 지원했어요. 김창룡 특무대장 밑에서 하사관으로요. 특무대는 미국 육군 소속 방첩부대인데 위세가 좋았거든. 음력 오월 초아흐렛날, 마침 큰아버지 기제사여서 고향마을 하포리에 와있었어요. 새벽에 쿵쿵! 대포소리가 나요. 그때는 휴전선에서 자주 총격전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지. 그런데 그만 전쟁이 터진 거야. 가족들이 모두 문산 국민학교로 피난을 갔어. 고향마을에 살고 있던 아내와 두 딸도 함께 갔어요. 나는 곧바로 원대 복귀했지. 정작 나는 별 고생 안 했지만 피란 나온 가족들은 보릿겨 먹어가며 금촌 일대에서 끔찍한 고생을 했어요. 그때 두 딸을 잃었지.”
53년 상사로 예편한 정주호 할아버지는 58년부터 문산극장에서 사업부장으로 일했답니다. 당시 문산은 미군 2사단이 있던 때라 양색시들 천지였고 극장은 문전성시였다죠.

“68년 미군부대가 떠나고 한국군 1사단과 교체되면서 극장은 파리가 날리더군. 극장을 나와 출입영농을 시작했지. 그러다 92년, 특별조치법으로 조상이 물려준 땅 2만3000㎡(7000 평)를 되찾았어요. 그전까지는 재산권 행사도 못했지 뭐요. 2001년, 해마루촌에 입주해 아들 둘, 딸 넷을 다 가르쳐 살림 내주고 마누라하고 둘이 살다가 작년에 먼저 떠나보냈소.”

이 노익장은 통일촌에 사는 북한 실향민들을 소개해주겠다고 나섭니다. 문산읍에 모시고 나와 칡냉면을 대접했지요.

산이 옆으로 비켜서 물이 휘돌아나간다는 횡산리의 두루미 서식지. 10월이면 학들이 와 겨울을 난다.

임진강변 최북단 마을, 경기도 연천군 중면 횡산리로 갑니다. 임진각에서 북동쪽으로 60㎞ 거리. 제28사단 태풍전망대 아래, 강변에 터 잡은 마을로 남방한계선에서 3㎞가량 떨어져 있답니다. 2010년 군남 홍수조절댐 건설로 마을 일부가 수몰되고 주민들도 많이 이주해 현재는 20가구 40명이 산답니다.

산이 옆으로 비켜서기에 물이 휘돌아나가는 횡산리는 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2호) 서식지. 마을 입구 왼편 강가에 조성된 ‘임진강 평화 습지원’에는 두루미 먹이용 율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얀 깃털에 목과 꼬리는 검고 머리꼭대기가 붉어 단정학(丹頂鶴)으로도 불리지요. 그냥 학이라고도 합니다. 몸길이 1m40㎝, 펼친 날개 2m40㎝가량의 아름다운 새. 두루미는 해마다 10월 말에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여기서 겨울을 나고 3월 말께 돌아간답니다.

겨울철새 학이 오는 마을이니 DMZ 청정마을답지요. 가구당 평균 6만6000㎡(2만 평)의 농사를 짓는데 주로 무농약 친환경재배라네요. 일손이 모자라 연천이나 동두천에서 일당 5만~7만원을 주고 일꾼들을 모집해 온답니다.

약 20만㎡(6만 평)의 농사와 소 150마리를 기른다는 부농(富農) 이용섭(72)씨는 때마침 피사리를 하고 와서 인부들과 함께 새참을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본래 이씨, 홍씨, 권씨가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어요. 우리 전의 이씨들은 360년간 대대로 살아왔지. 조상 묘들이 여기 다 있으니까. 38선 이북이었으니까 한국전쟁 당시는 북한이었소. 인민군처럼 열병해서 제식훈련하듯 학교 다녔어요. 인민학교(국민학교) 2학년 때 전쟁이 터졌어. 미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밀고 올라오자 북으로 피란을 갔지. 1·4후퇴 때는 미군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갔고. 동두천 거쳐 평택으로 갔거든. 살기 위해 한 번은 북으로 한 번은 남으로 떠돌아야 했어.”

철망 걷고 평화공원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이용섭씨는 그때 고향을 떠나서 수원, 청량리에서 살다가 청계천에서 전기재료 파는 상점을 운영했답니다. 그러다 1988년에 횡산리로 돌아왔다죠. 37년 만의 귀향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토지를 장만했느냐고 묻자, “못 믿을 건 사람이고, 믿을 건 오직 땅과 소 같은 가축이라오. 미국, 소련 땜에 남북이 갈리고, 전쟁 통에 타관에 나가 살면서 사기꾼들에게 돌리고 무슨 돈을 벌었겠소? 그래도 열심히 땅 파고 살다 보니 기회가 옵디다.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거지만 그래도 나 같은 경우는 6·25가 나서 남한 사람이 됐으니 불행 중 다행이지. 여기가 북한이라면 얼마나 끔찍해.”

그의 아내는 취재팀에게 밭에서 따온 상추를 곁들인 푸짐한 점심상까지 차려 내왔습니다. 맛나게 뚝딱 비워냈답니다.

가을에 학이 날아오는 가멸은 강촌, 누가 이 마을을 막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정겹고 마음 편한 고향마을일 겁니다. 그들은 여기서 십수 대에 걸쳐 몇백 년간 농사짓고 살아왔지요. 어느 날 갑자기 금을 그어놓고 38선 이북·이남 경계를 나눈 것도, 그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인 것도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했습니다.

횡산 정상의 태풍전망대는 군사분계선과 불과 800m밖에 안 떨어져 있어 북한 땅이 바로 코앞입니다. 망원경을 이용하지 않고 육안으로도 밭일하는 북한 농부들과 임진강에서 고기 잡는 북한군을 볼 수 있다네요. 공교롭게도 비가 뿌려서 시야가 흐린 게 유감. 하지만 전망대 브리핑 병사의 미담은 듬직합니다. 최무진 상병은 미국 국적인데 자원해서 입대했고, 전진표 상병은 아버지가 외교관이라 빠질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것도 같은데 씩씩하게 입대했다는군요. 근래 들어 이런 젊은 병사들이 꽤 있답니다. 이 대견스러운 젊은이들과 새삼 조국의 의미,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자연스럽게 탈북자 얘기도 나왔습니다. 개인의 행복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 절대 오래가지 못하겠지요.

DMZ 안 대성동마을에서는 오는 8월 2일 60돌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군요. 김동구(44) 이장은 “사람도 60세면 환갑잔치를 하는데 그동안 마을 조성과 번영을 위해 도와준 분들과 밥 한 끼라도 나누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DMZ를 걷어낼 수 있겠습니까?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평화통일로 나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지금으로선 남북 간의 진실한 대화가 절실합니다. 안정적 관리냐, 정면대응이냐. 원칙을 세우는 것도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남남갈등 문제 해결 없이 남북통일은 요원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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