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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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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적어도 겉모습의 카이로는 2년 반 전 혁명 때보다, 그리고 지난해 대통령선거 때보다 좋아졌다. 미터기가 없어 값을 흥정해 타는 낡은 검은색 택시(미터기가 있는 택시는 흰색이다)는 거의 사라졌고, 깔끔한 인테리어의 외국계 커피숍들이 목 좋은 곳마다 새로 생겨났다. 중산층 지역의 수퍼마켓에서는 수입품의 자리가 커졌고,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쓰는 젊은이도 부쩍 늘었다.

 하지만 만난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나아진 게 없고, 모든 게 나빠졌다”고 아우성이다. 생활이 더 어려워졌다는 불평투성이다. 혁명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졌다는 얘기다.

 상황은 대략 이렇게 전개됐다. 이집트 혁명 뒤 ‘낡은 것들’은 급속히 사람들의 눈 밖에 났다. 헌 택시나 찻집도 해당됐다. 새 세상을 빨리 느끼는 길은 ‘자유’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는 ‘소비욕의 충족’으로 쉽사리 동일시됐다. 시장은 사람들의 억압됐던 욕망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임금 인상 요구로 근로자들의 수입은 좀 늘었지만 물가도 뛰었다. 혁명 뒤의 정정 불안으로 통화 가치가 떨어져 유류 값도 올랐다(이집트는 산유국이지만 정유 시설이 없어 정제유를 수입한다). 차량 연료 공급이 원활치 않아 주유소의 긴 줄을 피하려면 암시장에서 두 배의 값을 치러야 했다. 정부 재정 상태가 나빠지면서 각종 보조금도 줄었다.

 한마디로 혁명 뒤 시민들의 ‘소비 눈높이’와 현실의 경제는 반대의 방향으로 달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혁명 그 자체는 부를 창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노동계 요구의 분출이나 시장 불안으로 경제에 주름살을 보탠다. 혁명의 역설이다. 1987년 6월 혁명 뒤의 한국은 ‘3저(낮은 환율·유가·금리) 호황’이라는 시대적 행운 속에서 이 역설의 고통을 피했지만 이집트에는 그런 복이 주어지지 않았다.

 성미 급한 이집트인들은 참지 못했다. 이들이 얼마나 성마른지는 조금이라도 빈 공간을 용납하지 않는, 막히면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려대는 도로의 차량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안다.

 시민과 군은 의기투합해 투표로 뽑은 대통령을 1년 만에 쫓아냈다. 한 정치인은 ‘리콜(불량품 교체)’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혁명 2.0’ 시대를 열었다며 폭죽을 쏘고 전투기를 동원해 에어쇼까지 펼쳤다. 군부는 현직 대통령을 감금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자신들 마음대로 새 대통령을 지명하고도 쿠데타가 아니라고 우긴다. 그 사이 한편에선 어디에 갇혀 있는지조차 모르는 옛 대통령의 복귀를 바라는 시민들이 모여 ‘결사항전’을 부르짖는다.

 옳건 그르건 대다수의 이집트 국민은 또 한 번의 신새벽을 꿈꾸고 있다. 이번엔 이들의 바람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2년 새 여섯 번째 출장, 이 나라 시위 중계에 점점 물려간다.

<카이로에서> 이상언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