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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성역 현충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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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빚나는 충의를 어디 비길꼬
저 하늘 해와 달을 올려다 보게.』
이것은 숙종때 사람, 목사 임홍량의 현충사 상량문중에 있는 노래의 한 귀절이다.
과연 해와 달로써 충의를 비길만한 그러한 충무공의 유적지에 세워진 현충사가 이제 역사적인 새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때는 사당 쓰러질 뻔>
1706년에 짓고 이듬해에 숙종의 사액을 받은 뒤로 2백여년 동안 향화가 끊이지 아니하다가 일제시대애 이르러 차츰 사당은 쓰러지고 충무공 묘소외 산관까지 일본인의 손에 빚으로넘어가게 되자, 위로 명사로부터 아래로 소학생·직공·노동자 및 해외의 동포돌에 이르기까지 글자그대로 눈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다시 세우고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니 1932년5월2일이었다.
본시는 현충사에 충무공만 모신 것이 아니라 공의 조카 이완과 공의 5대손 이봉상을 추향하여 같이 모셨던 것이었으나 현충사를 새로 세우면서는 충무공만을 모시게 된 이래 지금에이른 것이다.
경내를 10만여평으로 넓히고 사당과 유물 전시관 등을 새로 짓고 수림과 화초로 깨끗이 꾸며 거룩한 지역을 만든 것은 공의 유적지인 여기가 우리 민족의 정신적 도장이 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환도엔 호국의 충의서려>
특히 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는 공의 유물들은 하나하나 깊은 유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첫째는 두 자루의 환도다. 이 칼들은 임진란이 일어난지 3년만인 갑오년 4월에 한산도 진중에서 태귀련, 이무생들이 만든 것으로 한 칼에는 『삼척서천산하동색』이라 새겼고, 또 한 칼에는『일휘소탕 혈염산하』라 새겨 있다.
다만 내가 이 칼을 환도라 이름하는 까닭은 공의 난중일기 속에 환도로 적혀있기 때문이요, 경은 본시 환으로 써야 하는 것으로 칼과 자루 사이에 고리를 만들어 손을 보호하게시리 만든 칼의 이름이다.
다음은 옥로인데 옛날 높은 벼슬아치들이 갓 위에 다는 장식품으로서 옥으로 백로를 조각해 만든 것이다.
그리고 금대가 있다. 이것은 공이 전몰하기 45일 전인 10월초 4일에 명나라 유격 주원주가 공에게 선물한 것이요, 뒤에 이병모가 이 띠를 두고 명을 지은 것도 있다. 또 화주배란것은 공의 집안에서는 이것을 도배라고 일컫고 또 이충무공 전서에 실린 이병모의 글에는 금배라 적었으나 공의 친필 기록에 왕유격으로부터 금대의 선물을 받던 그날 명나라 장수 파총 진국경으로부터 나는「화주배일대」 (한쌍)를 받았다 하였으므로, 나는 이 술잔의 이름을 화주배라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명조팔사물」로서, 이것은 명나라 신종 황제로부터 받은 여덟가지 선물을 이름이다.

<팔사품은 전몰후 받은것>
ⓛ 「개방」두자를 아홉번 꼬부려 전자로 새긴 도독인을 비롯하여 ②영패 ③귀도 ④참도 ⑤독전기 ⑥홍소령기 ⑦남소령기 ⑧곡나팔등이다.
그런데 이 팔사물은 충무공과 최후 몇달동안 같이 있었던 명나마 수군도독 진린이 본국 황제에게 아뢰어 받게된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첫째 서로 인사한지 1백여일만에 돌아가신것이다. 공이 생전에 직접받을 만한 시일의 여유가 없은 것 같고, 또 기록으로 보아서도 공이 이것에 대해서 한마디 말한 것이 없으며, 행록·행상·익상등을 비롯해서 충무공 전몰 직후의 기록들인 이항복이 쓴 비문에는 전혀 적혀있지 않고, 뒤에 김육의 신도비와 현종 정조의 기록들에 와서 나타나는 것을 보아, 충무공의 전몰 후에 조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것들이 통제영에 보관되어 왔으며 1896년5월 제208대 마지막 통제사 홍남주로써끝날때까지 역대 통제사 춰임때에 의식 도구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이번에 충무시 충렬사에서는 이 물건들을 자기들이 보관하겠다고 한까닭도 거기에 있는 것이거니와 마침 그것들이 도독인을 제한 이외에는 모두가 두벌씩 되어 있으므로 한벌은 현충사 진열관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그모든 것보다 공익 유물로서 가강 귀중한 것은 친필로 쓴 7년동안의 『난중일기』7책(을미년 것은 분실되고, 정유년 것이 2책이 있음) 인데 빠지고 엾어진 날을 제하고 기사가 적혀있는 것은 모두 1,598일의 일기로서 얼마나 귀중한 문헌인지 모른다.
상계는 모두 78편인데 비록 친필이 아니요 등본이기는 하나, 그 내용이 임진사 연구에 막중한 자료가 됨은 물론이며 그밖에 교지와 서한들도 모두다 귀중한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우상아닌 동반자>
경내로 들어서면 정려가 있는데 이것은 충무공과 조카 이완과 4대손 이홍무와 5대손 이봉상 등 네 충신과 7대손 이제빈이란 효자를 합하여 다섯분을 표창한 곳이요, 충무공의 옛집과 가묘 그리고 공이 마시던 우물과 활쏘던 터라 전하는 은행나무들은 모두가 공을 연상케하는 유적들인 것이다.
공의 활 쏘던 곳이 이 언덕이요, 공의 말 달리던 곳이 저 기슭이라, 지금도 공의 모습이눈 앞에 떠오르고 공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곳이다.
공은 과연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존재다. 공의 정신이 우리민족의 지도이념이 되어야한다. 그대로 우리 생활 속에 실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충사를 성역화한 본의가 결토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민다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정신을 호흡할 수 있고 내것을 만들 수 있는 민족의 정신적 도장이 되는 곳에 있는 것이다.
공은 걸코 제사나 받는 우상적 존재가 아니며, 숭배의 대상이 되는 역사적 존재만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지도이념으로서 우리들의 현실 속에 살아있는 우리들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노산 이은상 <전 충무공기념사업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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