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미 대통령 셋 내리 배출 … 한국학 꼭 필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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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12면

미국 동부의 8개 명문대들을 통틀어 ‘아이비리그(Ivy League)’라고 부른다. 그중 하나인 예일대 학생들이 올 2월 ‘단체행동’에 나섰다. ‘한국학 전공을 개설하라’는 청원을 학교 당국에 낸 것이다. ‘하버드·컬럼비아 등 다른 대학엔 있는데 우리만 한국학 전공이 없다’는 게 이들의 목소리였다. 한국학은 역사·언어·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한국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재 예일대엔 일본학·중국학 전공만 있다. 서명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200여 명이 참가했다. 청원운동은 한국계 학생들이 이끌었지만 미국·유럽·중남미·동남아 등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호응해 준 덕분이었다.

미 예일대서 한국어 가르치는 김승자 교수

 김승자(61·사진) 예일대 교수도 “학생들의 청원운동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대학 동아시아어문학과에서 어학부장과 학부 부학감을 맡고 있다. 또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최근 미국의 대통령 세 명(조지 부시 부자, 빌 클린턴)이 모두 예일대 출신이에요. 우리 대학은 미국 지도자의 산실이죠. 앞으로 미국을 이끌어갈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우리 역사를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학과도 사정은 비슷하다. 동아시아어문학과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언어와 문학을 가르친다. 하지만 한국문학 과정은 없다.
 
예일대 한국어 공부 61년부터 맥 끊겨
김 교수는 “예일은 일본사에선 존 홀, 중국사는 조너선 스펜서 등 동아시아 학풍이 강한 학교”라고 소개했다. 예일대는 1943년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어 강좌를 처음 열었다. 47년엔 군인·외교관·선교사 등이 한·중·일 3개국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극동언어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난 뒤로 한국어 수요가 컸다. 한때는 한국어 강의를 듣는 학생 수가 일본어 강의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61년을 마지막으로 예일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의 맥이 끊겼다. 그리고 90년까지 한국어 과정은 없었다. 김 교수는 “요즘 한국학·일본학·중국학의 경계를 뛰어넘어 큰 틀로 바라보는 동아시아학이 학계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예일대의 경우 한국학이 없기 때문에 동아시아학 연구에서 균형감이 부족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어 “예일대에서 한국학 전공 개설은 전공자들이 아니라 한국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또 “한국의 관계 기관이나 기업은 최근 중국·동남아 등 지역의 연구에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다”면서 “결과가 곧바로 나오는 분야만 챙기지 않고 좀 더 먼 미래를 바라봤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학이 성장하는 과정을 이끌고 지켜본 산증인이다. 김 교수는 연세대 영문학 석사를 딴 뒤 76년 남편(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최재건 연구교수)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캐나다 토론토대와 예일대에서 각각 언어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87~89년 하버드대에서 한국어 강사를 지냈고, 90년 모교인 예일대로 옮겼다. 은사(恩師)였던 새뮤얼 마틴 교수의 요청 때문이었다. 마틴 교수는 ‘예일 표기법’이란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한 학자다. 당시 예일대 재미동포 학생회(KASY)가 8년간 끈질기게 운동을 벌여 한국학 과정이 29년 만에 다시 생긴 것이었다. 김 교수는 “첫 정식 강의날이 생각난다”며 “80명이 넘는 학생으로 강의실이 꽉 찼다. 정말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때 그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장면은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관심은 시들해졌고 한국어 강의는 주로 재미동포 학생들이 듣게 됐다.

 김 교수는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한국학 학자 중 원래 일본이나 중국학 전공자 출신이 많았다”며 “이 때문에 한국학은 일본학이나 중국학의 부속 과정이었던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대학에서 한국학 과정이나 전공을 만들자고 하면 ‘왜 필요도 없는데 돈을 쓰냐’는 반대 의견이 다수였다”며 “심지어는 ‘한국의 문물은 모두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데 왜 한국학을 배우느냐’고 묻는 미국인 교수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97년 외환위기 극복 후 다시 한국어 붐
김 교수에 따르면 88년 서울 올림픽을 즈음해 미국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한국이 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하면서는 한국학 인기가 부쩍 커졌다는 것이다. 그는 “2002년부터는 기초 한국어 강의를 들으려는 비(非)한국어권(non-heritage)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기초반 학생들이 10명을 못 넘었었는데, 20명 이상이 되면서 반을 2개로 나눴다”고 말했다. 한류의 영향도 있었다.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한국의 K팝 아이돌 스타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미국 학생들도 있다. 중국·동남아 학생들은 ‘한국 드라마를 봤다’면서 강의를 신청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현재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90여 개, 고교는 60여 개에 이른다.

 그가 길러낸 비한국어권 학생들의 실력은 대단하다. “한 학생은 서울에서 어학연수 때 겪었던 경험을 갖고 글을 썼어요. 밤늦게 한국인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취객이 시비를 걸었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역사·사회·정치적 관점에서 풀어나가더군요.” 김 교수의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술술 읽거나 80년대 한국의 임금문제를 공부하는 학생도 있단다. 김 교수는 “예로 들었던 세 명의 학생 모두 대학에서 난생처음 한국어를 배웠던 경우”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배우는데 많은 사람이 커서도 영어를 어려워한다”면서 “영어 학습법이 제대로 됐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회화만 해서는 한계가 있다. 문법과 독해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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