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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적군 함께 미역 감던 금성천이 지척인데…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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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군의 DMZ를 흐르는 금성천. 양측 고지에서 총을 쏘던 국군, 미군, 인민군, 중공군 병사들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발효되자 환호를 지르며 함께 천으로 뛰어들었다. 언젠가 이곳은 화해의 씨앗을 뿌린 곳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최정동 기자

철책 너머 6월의 비무장지대(DMZ) 안으론 한껏 푸르른 신록의 바다가 펼쳐진다. 산을 타고 벌을 건너오는 바람에 가지와 잎새가 흔들리는 정경. DMZ는 역설적이게도 한반도 어느 곳보다 겉으론 평화롭다. 그러나 ‘정전 60주년’으로 프레임을 바꾸면 DMZ는 전쟁의 피를 고스란히 품은 불안의 땅이다. 어쨌든 60년 세월이 지났으면 억지로라도 그곳에서 과거와의 화해 그리고 미래의 통합을 위한 씨앗을 찾아내야 한다. 이를 찾아 김재한 한림대 교수 부녀가 중부 전선 DMZ를 다녀왔다. DMZ학술원 원장인 김 교수와 딸 규현(16·민족사관고 1년)양은 동쪽 고성에서 서쪽 강화까지 DMZ를 여러 번 같이 답사했고 동·서독 분단선 기행도 함께해 분단을 통찰하는 안목이 예사롭지 않다. <편집자주>

지난 16일 찌푸렸던 날이 활짝 개었다. 투명한 공기를 음미하며 먼저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의 네덜란드 참전기념비를 찾았다. 6·25 전쟁 3년간 횡성을 중심으로 격전을 치른 네덜란드의 병사는 5300여 명. 그중 120여 명이 전사했다. 풍차를 연상시키는 흰 화강암 돌탑. 그 앞에 석상으로 서 있는 네덜란드 병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김재한 박사와 딸 규현(16). 

불쑥 규현이가 “네덜란드는 아직 전쟁이 안 끝났다고 생각할까요”라고 묻는다.

필자는 “아니겠지. 네덜란드는 인민군·중공군과 싸웠지만 현재는 적대관계가 아니야. 네덜란드는 중국·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니까. 6·25에 참전한 16개국도 거의 다 전쟁은 이미 끝났고 화해했다고 여길 거야”라고 답했다. 기성세대에 익숙한 상황이 10대인 규현이에겐 다르게 비춰지는 모양이다.

“네덜란드 참전비 옆에 국군의 베트남 참전기념탑이 있네요. 남베트남은 망했고 베트남 전쟁은 끝났잖아요. 그럼 베트남은 그때 싸운 나라와 화해했나요?”

“물론이지. 베트남은 한국이나 미국과 화해했어. 6·25 전쟁 당사국인 남북한, 미국·중국 사이에 화해가 잘 안 되는 게 문제지!”

규현이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데 언젠가 다들 화해하겠지요”라고 답한다.

딸 아이의 희망이 당장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나라가 격전을 벌였던 기억이 여전히 강하기 때문이다. DMZ에 인접한 화천의 파로호(破虜湖)도 강렬한 기억을 뿜어내는 곳이다. 1944년 화천댐이 들어서면서 북한강 상류에 들어선 이 인공 호수의 원래 이름은 대붕호.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수장시킨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로 개명했다. 중국으로선 유쾌하지 않은 명칭이다.

그래서 최근 파로호에 중공군 위령비를 세워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보수 측의 반대가 커 모든 전사자를 위령하는 비로 추진되고 있다. 한·중이 가까워져도 완전한 화해까지의 거리는 멀다는 증표다. 규현이가 “억지로 끌려와서 전사한 건데… 백마고지 위령비는 죽은 군인의 편을 안 가리고 다 추모하잖아요”라고 말을 흐렸다.

한국이 파로호를 기념한다면 철원의 상감령(上甘嶺)은 중국이 ‘6·25전쟁의 성지(聖地)’로 여기는 곳이다. 상감령은 북한 최고 지도자들이 가끔 방문하는 오성산(1062m) 남쪽, 한국이 저격능선(580m)이라고 부르는 북한의 김화지구 능선 바로 옆에 있는 고개다.

이 고개를 둘러싼 전투는 중국에서 56년 ‘상감령’이란 영화로 제작됐다. 중공군이 대형 동굴을 만들고 미국과 사투를 벌여 승리한다는 내용인데 우리는 국군 2사단, 미군 7사단이 중공군을 저지한 것으로 기록한다. 중국에서 국가(國歌)로 여겨지는 ‘나의 조국’은 이 영화의 주제곡이다. 2011년 백악관에서 열린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환영 만찬 때 중국인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해 미묘한 외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1 적근산의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찾아낸 포탄과 탄피들. [사진 김재한 교수] 2 파주의 적군 묘지. 발굴된 인민군·중공군 유해는 북한·중국이 인수를 안 해 여기 묻는다.

필자는 저격능선과 상감령을 멀리서라도 보려고 3사단의 계웅산 관측소(OP)를 방문하려 했지만 출입 허가가 나지 않았다. 대신 김화읍에 있는 저격능선 전적기념비를 찾았다. 기념비 양옆, 오성산을 겨누는 대포는 과거의 그림자가 여전히 두터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늘 싸우지는 않았을 터. 그런 곳을 찾아 DMZ 남방 한계선과 나란히 달리는 김화(철원)~산양리(화천) 도로로 차를 몰았다. 철원·화천군의 경계인 말고개는 임진왜란 때 왜장이 고개를 넘지 않으려는 말을 베었다가 뒤에 큰 화를 입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말고개 정상에는 ‘금성지구전투전적비’가 있다. 그럼에도 삼엄한 단어 뒤에는 언젠가 ‘화해의 씨앗’이 될 만한 실마리가 숨어 있다.

금성지구, 정확히 금성천 일대는 53년 7월 당시 2년이 넘게 일진일퇴가 반복되는 피바다가 돼 있었다. 후에 전사(戰史)에서 ‘6·25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힌 곳이다. 장대비에도 아랑곳없이 총성과 포성이 격렬히 터지던 바로 다음 날. 고지 능선에서 느닷없이 국군, 미군, 인민군, 중공군의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군인 둘이 뛰어내려와 고지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내로 뛰어들었다. 이날은 바로 7월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되던 당일이었던 것이다. 피부색이 다양한 200여 명의 군인은 피아 구분 없이 물로 뛰어들어 휴전을 기뻐했고,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데 감사했다. 당시 국군 정보문관이었던 지홍운옹이 직접 목도한 광경이다. 지금 금성천에서는 북한군 병사들만 여름철 가끔 미역을 감는다.

김재한=“방금까지 총을 쏘다가 휴전이 되자 함께 미역을 감는 것을 보면 아무리 적이라도 개인끼리 화해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규현=“전에 독일에서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곳을 여러 군데 갔잖아요. 그때는 죽은 뒤에라도 화해는 반드시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면 한반도 땅에서 죽은 자는 화해하고 있는가. 19일 금성천의 남쪽 발원지인 적근산의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았다. 장마가 시작된 다음 날이라 날은 맑았지만 길은 젖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던 15사단 군용 지프가 갑자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용을 쓰던 차는 지뢰지대 출입 차단 철책에 걸려 멈췄지만 하마터면 지뢰가 깔린 골짜기로 추락할 뻔했다. 전사자의 죽음을 강렬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뜻밖의 신고식이었다.

적근산 유해 발굴터는 두 곳이었다. DMZ 남방 철책 바로 옆 735고지에서는 2011~2012년 100여 구가 발굴됐다. 현재는 735고지의 남쪽 골짜기 건너편 능선에서 발굴이 진행 중이다. 작업 기간은 6월 3~28일. 15사단 김요한 대위는 “유품들은 나왔지만 유해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2013년 6월 현재 유해는 국군 6996구, 유엔군 13구, 북한·중공군 1001구로 총 8010구가 발굴됐다. 국군 유해는 신원이 확인되면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고, 안 되면 정밀 감식 후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임시 안치한다. 유엔군 유해는 해당국에 인계한다. 북한군·중공군 유해는 유엔사를 통해 인수의사를 타진하지만 모두 거부 당했다. 그래서 이들의 유해는 파주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현재 이름 북한군·중국군 묘)에 매장된다. 한반도에선 죽음도 적의를 씻어내지 못했다.

규현=“적군묘를 보니 베를린 장벽의 십자가가 생각나요. 동·서독 경계를 넘다 죽은 동독인이 1000여 명인데 그중 4분의 1이 베를린 장벽 근처에서 사망했다잖아요. 그래서 브란덴부르크문~제국의회 의사당 구간에는 장벽을 넘다 죽은 70여 명을 기리는 흰 십자가가 있어요. 죽어서야 베를린 장벽을 넘었으니 안타까워요. 남북에는 죽어도 고향에 못 가는 영혼들이 많네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화해하지 못하는 건 참 슬퍼요.”

딸과의 일정은 철원의 궁예도성터에서 마무리됐다. DMZ 안 풍천원 벌판에는 후삼국시대 한반도 통일을 지향했던 궁예의 도성터가 있다. 터의 남북 경계는 DMZ의 남북방 한계선과 거의 일치한다. 그게 문제다. DMZ 복판이라 제대로 조사를 못한 것이다. 6·25 뒤 답사단이 출입했지만 엄밀한 의미의 발굴은 못했다. 세월에 따라 흔적은 옅어지고 자취는 바람에 흩어질 것이다. 남북 공동 발굴로 과거를 공유한다면 화해와 통일을 향한 의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규현=“몇 년 전 여기에 왔을 때 궁예도성터 근처가 불타고 있었어요. 시야를 가린다고 남북 잡목을 불태웠건 거예요. 그래서 제 머릿속의 이미지는 불타는 도성터예요. 독일에서 여러 고성(古城)들이 인상 깊었는데, 그 가운데 동·서독 분단선에 서 있던 한슈타인성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막연하고 희미한 통일의 당위성보다 뚜렷한 화해 공감대가 남북한 간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김재한=“6·25 전쟁에 관한 국가 간 공감 못지않게 우리 사회의 계층·세대 간 공감도 중요하단다. 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에 대해 우리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규현=“말이 통하니까 탈북자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죠. 축구를 해도 대부분은 북한을 더 응원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북한뿐 아니라 인류 모두의 인권에도 관심이 많아요. 같은 민족이라고 북한에만 관심 갖지 말고 전쟁, 평화, 생명, 번영 같은 인류의 가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김재한=“며칠 전 우리 고교생 69%가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규현=“그런 생각을 하는 애들이 제 주위엔 많지 않아요. 학교나 가르치는 선생님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대부분은 통일에 무관심한 거 같아요. 전쟁을 안 겪은 세대잖아요.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기보다 합리적인 생각이 올바른 평화와 통일의 길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해요.”

정전협정의 평화는 불안한 화해지만 그래도 60년 동안 내용은 진화돼 왔다. 그렇다면 옛날과 달리 맹렬한 적의가 없는 지금 세대는 DMZ의 평화를 더 진화시킬 것인가. 전쟁을 종식하는 화해의 날이 멀지 않으리라 믿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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