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아침]-'노부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최영철(1956~) '노부부' 전문

늦은 밤 지하도 모서리 자리 펴고
얻어온 것 서로 입에 넣어주며
화려했던 한 시절 나누고 있는 부부
집도 절도 사랑도 명예도 가고
어디 소풍이라도 나온 듯
부끄러움도 기다림도 남은 게 없는
풍비박산의 시간을 베개 삼아
조금 추운지 거짓말 같은지
빙그레 껴안고 잠든
두 개의 둥근 알.

-최영철(1956~) '노부부' 전문

알은 누가 따뜻하게 품어줘야 부화한다. 꿩알은 꿩이, 두루미알은 두루미가 품어줘야 알 껍질을 깨고 어린 새가 세상으로 걸어나온다. 대부분 달걀의 비극은 냉장고에서 일어난다. 하나의 달걀마다 하나의 고독이 있고 하나의 달걀마다 추위가 있다.

노숙자들은 세상이 춥다. 추워서 지하도 한 구석에 보금자리를 튼다. 추운 알들끼리 서로를 품고 잠든 풍경. 인생역전을 앞세운 로또복권의 열기는 거짓말처럼 그 노부부를 비웃으면서 지나간다.

최승호<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