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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카지노, 하려면 제대로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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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도박 중독도 유전자 탓이 크다는데, 다행히 나는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 화투든 카드든 판에 끼었다 하면 십중팔구 잃는다. ‘잃는 유전자’를 타고난 셈이다. 그래서 추석이나 설 연휴 때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끼리 포커 게임이라도 벌어지면 미리 잃을 목표액(?)을 정하고 간다. 판판이 깨지는 이유, 나도 안다. 포커페이스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에이스 투 페어(two pair)만 들어와도 저절로 얼굴이 상기되고 자세 바로잡고 담배까지 찾아 무니 친구들이 금세 감을 잡는다.

 오래전 미국 여행 때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를 구경한 적이 있다. 50달러가량 잃고 나서 미련 없이 손을 털었다. 국내 유일의 내국인 카지노인 강원랜드도 한번 가봤다. 지금 생각해도 섬뜩한 것은 초라한 입성에 눈빛만 퀭한, 몇몇 이질적인 손님들이었다. 알고 보니 도박중독으로 모든 것을 잃고도 강원랜드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죽돌이’들이었다. 부근에 널린 전당사(전당포)·모텔·찜질방과 오버랩되는, 음울한 풍경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영종도 외국인 전용 카지노 사업 허가 여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명박(MB)정부 시절인 작년 9월 국무회의에서 경제자유구역특별법 시행령을 개정한 이후 급물살을 탄 현안이다. 바뀐 시행령의 핵심은 카지노업 사전심사제 도입이다. 원래는 먼저 3억 달러를 투자한 후 2억 달러 추가 투자를 약속해야 카지노 허가가 가능했는데, 이를 5000만 달러만 납입하면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조건을 대폭 완화했다. 이로써 전 세계에서 진입장벽이 가장 낮아졌다. MB가 회의석상에서 최광식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나무라면서까지 밀어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애써 경제자유구역을 만들어 놓았는데 돈과 사람은 몰려들지 않고 부동산 경기마저 바닥을 헤매서다. 카지노는 지금 인천지역의 숙원 사업이나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놓고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와 문화체육관광부는 반년 이상 줄다리기를 벌였다. 산자부는 빨리 하자고, 허가권을 가진 문화부는 신중히 하자는 입장이었다. 최광식(현 고려대 교수) 전 문화부 장관은 “카지노는 지식경제부가 경제자유구역을 위해 내린 일종의 극약처방이었다”며 “문화부도 꼭 안 한다, 반대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국민정서도 있고 하니 원래 있던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졸속을 피하려 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며칠 내로 허가 여부가 결정 난다. 유진룡 문체부 장관도 “6월 중 결정하겠다”고 공언했다. 지난주에는 공무원, 관광·투자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사전심사위원회가 2박3일간 심사작업을 벌였다. 영종도 카지노를 희망한 사업자는 둘이다. 미국계 시저스엔터테인먼트와 중국계 리포그룹이 합작한 LOCZ(리포&시저스), 그리고 일본계 유니버설엔터테인먼트다. 사전심사도 끝났으니 이제 장관 발표만 남았다.

 도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하지만, 사실 카지노 유치는 장점이 많다. 일종의 필요악이다. 영종도가 염두에 두는 것은 중국계 큰손들이다. 카지노만 만드는 게 아니라 대규모 복합리조트(IR·Integrated Resort)를 조성해 MICE(회의·보상관광·컨벤션·전시회) 산업을 일구자는 계획을 갖고 있다. 돈이 몰리고 많은 일자리가 생긴다. 그래서 아시아 각국도 2010년 개장해 잘나가고 있는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샌즈를 모델로 카지노 신설을 구상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외국인 전용은 물론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오픈 카지노도 더 생기는 게 불가피해 보인다. 마카오나 싱가포르에 가는 돈을 끌어와야겠고, 엄청난 규모의 지하 도박산업에 햇볕을 쐬어 줄 필요도 있다. 강원랜드의 내국인 카지노 독점권은 2025년 끝난다. 외국자본이 지금 외국인 전용 카지노에 입질하는 것은 장차 오픈 카지노가 허용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라스베이거스 샌즈그룹, MGM그룹 등 세계적인 카지노리조트 기업들이 한국 진출의 전제로 삼는 게 바로 내국인 출입 허용이다. 따라서 도박중독 대책이나 국부 유출 가능성 등 부작용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시야는 멀리, 정책은 극히 섬세하게 짜야 하는 국가적 숙제다.

 그런 점에서 여론 수렴이나 국회 논의도 없이 국무회의에서 시행령만 고친 후 밀어붙이는 지금 방식은 뒤탈이 날 우려가 크다. 이번에 신청한 외국계 사업자의 실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다. 사전심사제라는 이상한 제도부터 바로잡은 뒤 추진해도 늦지 않다. 결국 국회가 나서야 한다. 매사 정공법이 가장 나은 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