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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60주년 … NARA 사진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④ 6·25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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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그전 2년간 반복되던 ‘국지적 분쟁’과 달리 38선 전역에 걸친 ‘전면 공세’였다.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으며 1년간 공격 준비를 해온 북한군은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를 앞세워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김일성 “미국은 개입 안 할 것” 오판

 우리는 얼마나 북한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던가. 남침이 있기 직전인 6월 23일 자정을 기해 한국군에 대한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전면전의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북한의 공격 준비는 군대의 전진배치, 소련제 무기의 북한 유입, 공격 루트에 있던 교량과 도로의 보강 등으로 이어졌다. 국제정세의 변화도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1949년 8월, 소련은 카자흐스탄에서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50년대 후반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을 10년 가까이 앞당기는 결과였다. 미·소간 핵전쟁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49년 10월엔 중국이 공산화되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6·25전쟁은 북한과 소련의 거듭된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1949년 2월과 50년 3월 각각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확대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탈린을 안심시켰다. 함께 소련에 간 박헌영도 남한 내 잠복한 남로당원이 합세하여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전쟁 발발 이후의 상황은 그들의 바람과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엔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붕괴하지 않았다. 북한군의 공격을 침략행위로 규정하면서 유엔회원국들이 군사적으로 지원을 하겠다는 유엔안보리의 결정, 그리고 미 해군과 공군을 한국전쟁에 투입하는 결정이 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

 유엔안보리 결정에 이어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지상병력 투입을 결정했다. 7월 1일 일본 남부 규슈(九州)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의 21연대 1대대(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가 한국으로 급파됐다.

 ‘스미스 부대’로 알려진 이 첫 번째 미군부대가 부산과 대전을 거쳐 오산-수원 간 국도가 내려다보이는 오산 인근의 언덕 주변에 진지를 구축한 것은 7월 5일 새벽 무렵이다. 이때 미군의 첫 번째 전사자인 케네스 셰드릭(당시 19세) 일병을 비롯해 약 160여 명이 전사했다.

 개전 후 3개월간 지상에서의 전투는 북한군의 일방적 승리로 진행됐다. 전선의 일방적 후퇴를 그나마 지연시킨 것은 공중전이었다. 6월 27일 정오에 시작된 공중전에서 유엔군은 북한군보다 우세를 보였다.

 김포비행장을 내습한 북한의 야크기 세 대가 미군 F-82에 의해 격추된 것이 첫 번째 교전이었다. 미 공군은 적의 주요 병참시설에 대한 전략폭격과 지상군 병력을 지원하기 위한 전술폭격을 병행했다. 이런 가운데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것은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었다.

일방적 후퇴,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

 전쟁은 참혹했다. 남북한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한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남한 측 군인의 사망·부상·행방불명 인원은 98만7000명, 유엔군 피해자는 15만1500명이었다. 민간인의 사망·부상·행방불명도 80만4600명에 달했다. 북한의 피해도 이에 못지 않았다. 남북한 이산가족은 1000만 명이 넘었다.

고지훈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배영대 기자

 ※인천상륙작전 이후 6·25전쟁 기록은 다음 회에 실립니다. 신문에 소개된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http://archiv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약칭. 미국 역사와 관련된 기록을 보존·제공하는 독립기관이다. 19세기 말 이후 한국 관련 사진 10만여 장을 소장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2001년부터 국외 소재 한국사 자료를 수집해왔다. 이번 시리즈에 실리는 해방 이후의 사진은 대부분 주한미군에 배속됐던 미육군통신대(Signal Corps) 사진부대(Photo Detachment)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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