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정원의 임무가 정권 안보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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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검찰이 어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국가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이 결국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이번 기소는 국정원이 과연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그 존재 의미를 되묻게 한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어제 오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시민단체·노조 등이 모두 ‘종북좌파’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고 이들 세력의 제도권 진입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확대 개편된 심리전단 사이버팀 요원들이 인터넷 글 게시나 추천·반대 클릭 등 사이버활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하고 그 결과를 원장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검찰 조사 결과 문재인 민주당 후보 등에 반대하는 내용의 게시 글은 모두 73건이었고, 대선 관련 찬반 클릭은 1281건에 달했다.

 원 전 원장에게 적용된 혐의가 법적으로 유죄인지는 법원에서 가려져야 한다. 다만 유·무죄 판단을 떠나 이번에 드러난 ‘원세훈 국정원’의 일부 활동은 정상적인 직무 범위 내에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검찰이 제시한 원 전 원장 지시 내용을 보면 그의 취임 후 국정원이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원과 정부 정책 홍보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선거에는 단일화하라는 게 북한의 지령이다”(2010년 4월)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한다”(2012년 2월)는 등의 발언이 어떻게 순수한 대공(對共)·안보 업무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국가 안보의 최일선에 있는 기관이 직원들을 동원해 민의를 왜곡시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기 문란 행위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인력과 자원이 본연의 임무가 아닌 곳에 투입된다면 국가 안보도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원 전 원장 기소를 계기로 국정원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 시급하다. ‘대통령님을 잘 보좌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란 식의 사고는 권위주의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맞게 현실 정치와의 고리를 끊고 조직과 의식을 재편할 필요가 있다. 정권이 끝날 때마다 국정원장이 법정에 서는 치욕을 더 이상 되풀이해선 안 된다.

 검찰이 이번 수사에서 보여준 모습도 실망스럽다. 검찰은 원 전 원장에 대한 혐의 적용 및 신병처리를 놓고 보름 가까이 갈등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민주당이 법원에 재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된 지난 10일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뒤늦게 ‘선거법 위반-불구속 기소’로 가닥을 잡았지만 수사 결과 발표 직전에 수사자료가 유출되는 등 논란은 막판까지 이어졌다. 검찰이 그간 자체 개혁 작업을 벌여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은 눈앞에 나타난 수사 과정과 결과를 보고 개혁 의지를 판가름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검찰 스스로 달라진 자세를 보여주지 못하는 한 외부로부터의 개혁 대상에 그칠 뿐이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