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묘 시비|꼬리무는 반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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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적 21호『전금유신묘』를 둘러싼 사학계의 거두 이병찬·김상기 양박사의 부부논쟁은 서로 팽팽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어 주목되거니와 이번 경주박물관 박일??관장의 현지조사 기록이 발표되고 있어 학계의 논쟁으로 크게 번지는 감이 있다. 15일 간행예정인 미술사학계의 동인지「고고미술」은 이번 1백호 기념논문으로 박관장의 글을 특집으로 엮고 있다. 【김유신 장군묘의 시비를 가리는데 참고가 되기 바란다』고 서두에서 밝힌 이 논문에서 그는 문제의 발단이 된 서악서원발견의 비편을 다시 조사하고 거기 절이 『단문오대왕』이란 귀절이 무자왕의 제2왕자인 김인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또한 이제까지 김인문 묘로 알려진 2기의 고분 옆에 있는 비좌(귀부)를 실측, 그것이 비신과 일치하는 것임을 실증함으로써 이병찬박사의『둘이 부합되지 않은 딴것들』이라는 견해를 뒤엎었다.
박관장은 서악서원근처에 김인문 묘가 있었으리라는 이박사의 가설에 대해서도『무덤자리에 그런 정사를 세울리 없다』고 전제하고「이박사의 단정대로 한다면 현 김인문 묘 남쪽에 수지사가 있었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위치도 흔적도 없다』고 맞서고 있다.
「사적 21호는 김유신 묘가 아니다』라는 이박사의 발표로 비롯된 이 논쟁은 그동안 김상기박사의 반증(중앙일보9월28일자)으로 더욱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박사는 조선일보지상(10월 27일)을 통해「반론에 대한 재반증」을 펴 소신을 다시 재확인했다.
이박사가 재반증에서 새로 제시한 주장은 ①김유신 묘는 본시 신무왕릉인데 오무왕(김유신)과 발음이 비슷해 후계에 혼돈을 일으켰다 ②김양 묘가 태종릉에 배장했둣이 김유신 묘도 그 같이 배장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여상기박사는 「흥무」와「신무」의 발음 혼돈이란『괜한억설』이라 일축하고 『신무왕은 장보고의 원조로 민애왕을 타도하고 즉위 수개월만에 별세한 만큼 김유신에 비할 바가 안 되는 임금』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현 신무왕릉에 병석과 12지 신상이 없으므로 왕릉으로 볼 수 없다는 이박사의 견해에 대해서도『그보다 업적 많은 통일 후의 왕릉에도 없는 예가 허다하다』고 반증했다.
김박사는 또 김유신을 태종릉에 배장했다는 이박사의 삼국사기해적에 대해서도『구례를 따랐다함은 도부염장 즉 장례를 후하게 했다는 뜻일 뿐 무덤의 위치까지 석례를 따른게 아니라』고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박사는 당시의 비석들이 비슷비슷하며 복원가정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일찌기 이퇴계 시대에도 현 김인문 묘를 김유신 각간묘로 알고 있었으며(퇴계집 답이강이서) 그러기 때문에 그 이웃에 서악정사가 세워진 것임을 지적,「구례」란 넓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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