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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맞서라, 현대라는 이름의 획일성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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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이반 일리치 지음
권 루시안 옮김
느린걸음, 399쪽
2만8000원

열한 살에 유대인 박해의 참상을 겪으며 ‘나는 결코 아이를 낳지 않으리라’ 결심한 아이. 스물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대에서 토인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스물다섯에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30세에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이 된 천재적 사상가. 외국어 수십 개를 구사했으며, 급진적 사상으로 ‘외교상 기피인물’로 지목되고, 쇠사슬로 린치를 당하고 총격까지 감내하며, 신부로서 누린 모든 특권과 지위를 포기한 사람.

 그런 이반 일리치는 아파트라는 편안한 요새에 자신을 가둔 채 모든 상품을 배달시키며 나른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을 ‘호모 카스트렌시스’ 즉 ‘수용되는 인간’이라 부른다. 시스템은 분명 편의를 제공하지만, 시스템 바깥을 상상하고 도전하는 최초의 용기를 앗아간다.

 실제로 우리는 아파트라 불리는 거대한 누에고치에 갇혀 진정한 ‘정주(定住)의 기술’을 잃어버렸다. 의료기술에 의지하느라 고통을 견디는 마음의 기술을 잊어버린 것처럼. 학교에 의지하느라 자발적 배움의 기술을 잊어버린 것처럼. 웰빙의 테크놀로지에 결박돼 죽음을 맞이하는 기술을 잊어버린 것처럼.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는 전세계를 떠돌며 개발의 허위와 자본의 참상을 고발한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연설문 모음집이다.

 “소비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두 종류의 노예가 생겨난다. 하나는 중독에 속박된 노예, 또 하나는 시기심에 속박된 노예이다.”

 이반 일리치는 『공생을 위한 도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류가 역사상 가장 무기력한 인간들로 전락한 이유를 다음 같이 설명했다. 쓸모 있는 물건을 너무 많이 만들면 쓸모 없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고. 그가 평생에 걸쳐 투쟁한 권력은 바로 거대한 시스템에 개인의 자율성을 종속시키는 문화였다.

 시스템의 얼굴은 천양지차지만 그 본질은 소름 끼치도록 획일적이다. 시스템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군대에 자원하는 미국청년들은 대부분 선량하다. 그들은 애국심의 이름으로 전쟁을 양산하는 사회 ‘시스템’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끔찍한 일을 저지른 후,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는다. 의협심으로 시작된 순진한 선택이 평생의 고통을 초래한다. 개인의 자발적 선택은 이 순간 무력해진다. 시스템의 거대한 악이 공기처럼 퍼져있을 때, 홀로 고고하게 도덕의 방독면을 쓰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리치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현재의 삶을 투시함으로써, ‘개발’이라는 가치로 짓밟힌 삶의 원초적 질감을 전투적으로 복원해낸다. 현대인에게 집이란 “수송수단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에 밤새 노동력을 보관해두는” 수납창고로 변질되었다. ‘우리 집은 좁고 허름하고, 여하튼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끝없이 인테리어에 돈을 쓰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재테크에 사력을 바친다.

 옛사람들에게 집이란 “그날그날 살아가며 자신의 일대기를 한 올 한 올 풍경 속에 적어 넣는” 곳이었다. 타인의 공간을 부러워할 필요 없이 내가 있는 곳이 곧 세상의 중심이었다. 매일 조금씩 내 손으로 내 집을 수선하고 가꾸는 것은 ‘남에게 맡기고픈 귀찮은 노동’이 아니라 ‘내 삶을 내가 보살피는 자연스런 행위’였다.

 과거의 거울과 현재의 최첨단 문명의 싸움은 지금 내가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일어난다. 나는 과거의 유물이고, 학생들은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전사들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컴퓨터로 전시되는 화려한 프리젠테이션이 아니라, 심장에서 솟구쳐 나오는 뜨거운 문장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잉여와 잡음’으로 감지된다. 감정과 의미를 담은 뜨거운 문장은 불안과 격정을 불러일으켜, 삶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바이러스’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낡아빠진 과거의 거울에 집착하는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수공업적으로 느리게 담금질된 소박한 문장을 요구하며 아이들과 끝없는 기싸움을 벌인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블랙홀에 내 감정과 추억의 모세혈관을 한 오라기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 본질을 꽁꽁 숨기고 사랑받기보다 내 본색을 마음껏 드러내며 미움받고 싶다. 나에 대한 당신의 사소한 미움을 세상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 그날까지.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이들에게, 심지어 ‘함께 낡은 거울이 되자’고 속삭이는 이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그와 함께 속삭이고 싶다. 우리 삶을 진정으로 뒤흔드는 폭풍의 눈은 ‘검색어 순위’가 아니라 차마 입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저마다의 살아있는 슬픔들이라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주는 이가 없다면 결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이야기, 쉽게 검색되지 않는 이야기, ‘구글링’ 할 수 없는 삶의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정여울 문학평론가

●정여울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문학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을 써오고 있다. 『시네필 다이어리』 『마음의 서재』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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