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평등주의는 창조경제의 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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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좌승희
KD 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요즘 한국은 창조경제를 찾느라고 분주하지만 별로 신통한 답을 못 찾고 있다. 창조경제란 마차를 만들던 경제가 창의적인 새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차, 나아가 자동차, 더 나아가 비행기·우주선을 새롭게 만들어냄으로써 경제의 차원이 더 복잡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새로운 재화와 서비스가 창출돼 경제 복잡성이 증가하는 현상을 일컬어 복잡 경제의 창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경제의 경우 1960년 마차경제가 90년에는 복잡성이 획기적으로 증가해 자동차경제로 전환됐다. 경제 복잡성의 증가는 30년간 연평균 8.5%가 넘는 국내총생산(GDP) 증가와 80배 이상의 소득 증가라는 눈부신 변화를 수반했다. 획기적인 창조경제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은 산업구조 변화와 경제 복잡성의 증가는 둔화하고, 거시경제 성장 잠재력은 3%대 아래로 떨어졌으며, 1인당 소득은 세 배 증가에 머물고 있다. 한국 경제가 아직도 비행기·우주선 경제로 도약을 못 이루고 있음이 지금의 창조경제 논의의 배경인 셈이다. 창조경제는 우리가 이미 이뤘던 것이며 외국은 바로 우리의 이 경험을 배우고자 애쓰는데 우리는 거꾸로 성공 경험은 다 팽개치고 밖에서 그 답을 찾으려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창조경제는 창의적 인재와 혁신적 기술을 자본과 결합해 새로운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 기업이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정책이 이를 도울 수 있는가? 우수한 학생과 과학자와 연구자를 우대하는 수월성 교육, 과학기술 및 연구개발(R&D) 정책, 기업의 규모에 관계없이 창의적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 우수 기업에 대한 지원제도와 정책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사회 전체가 수월성을 존중하고 성공하는 인재와 기업을 존중하는 진취적 이념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적 노력으로 흥하는 이웃을 정책적·이념적으로 존중할 줄 아는 사회라야 창조적 경제인과 과학자와 기업을 양산해낼 수 있다. 그래서 경제적 차이·차등을 적극 수용하는 사회는 창조경제를 일으킬 수 있으나 경제적 평등에 집착하는 사회는 창조적 동기를 차단하게 된다.

 개발시대 한국은 바로 창조적 인재·과학자·기업을 적극적으로 우대하는 차별적 지원 정책을 시행했다. 성과가 우수한 기업과 인재들을 더 대접하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따랐으며 이를 통해 창조에 대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역동적으로 새로운 경제 창조에 나서게 하고 ‘하면 된다’를 사회이념으로 체화시킬 수 있었다. 창조적 중소·중견기업들이 국가의 뒷받침 아래 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은 개발시대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제 모든 경제·사회 정책이 수월성이나 창조성보다 평등과 균형을 강조하는 민주정치 이념하에 성과를 무시한 평등한 지원 체제로 바뀜으로써 창조적 인재나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폄하됐다. 창조적 동기를 차단하는 평등주의적 경제·사회 정책들이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약화시키고 경제의 하향 평준화를 부추겨 자동차경제에서 비행기·우주선경제로의 창발을 막고 있는 것이다. 과거 정부들의 벤처, 첨단 동력산업, 녹색성장산업 육성 정책 등 창조경제 노력들은 대부분 큰 성과를 못 냈다. 창조적 개인과 기업을 배려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자원 배분 정책이 원인이다.

 경제적 결과의 불평등은 창조경제의 친구가 될 수 있으나 경제평등주의는 창조경제의 적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는 성공 경험과 실패 경험을 앞에 놓고 선택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평등주의에 치우친 정치적 자원 배분은 당장 모두를 편안케 하지만 5년 뒤 성과는 많지 않을 것이다.

좌승희 KD 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