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북괴숙청사-인물중심으로- 강인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공산국가의 계속적인 숙청은 하나의 생리적작용이다. 독재자의 절대권력을확립하기까지 또는 독재적인 권력구조를 계속 유지하기위해서는 무한정한 숙청이되풀이된다. 공산주의자들이흔히 쓰는 투쟁이란 용어는 바로 이것을 뜻한다. 북괴도당의 경우도 결코 예외일수가 없다.
북괴정치사는 곧 김일성독재를 확립하고, 이를 계속 유지해 가기위한 유혈적 숙청사였다.
해방직후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제창하던 북한내의 민족세력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선생이 소련군정 정치사령관「로마넹코」소장에의해 감금된것을 필두로 수많은 애국자들이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혀「시베리아」로, 강제노동수용소로, 또는 감옥에서 희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김일성을 소련군정의 꼭둑각시로 앉혀 위성국화하려는 소련정책에 반대하던 인물들도 숙청되었다. 관서지방 국내공산주의지도자였던 현준혁은 김일성의 첫암살희생자가 되었다(45년9월28일백주).
한편 관북지방 국내공산주의자의거물인 오기섭 정달헌 주령하등도「좌우경기회주의해독분자」로 낙인찍혀숙청되었다(46년11월).
해방직후부터남한에서「찬탁투쟁」「정판사사건」「10월폭동」을 조직하여 극렬한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한바있는 남노당계열도 김일성 독재강화의 희생물이 된것은 재언할 여지도없다.
48연9월북괴정권발족시에는 부수상겸 외상에 박헌영, 농림상에 박문규, 사법상에 이승엽,노동상에 허성택, 보건상에 이병남등이 앉았었고, 49년6월「남북노동당의 합당」시기에는 박헌영에게 중앙위 부위원장감투를주었으나 이러한 대우도 6·25사변을 계기로 종말이 왔고, 일거에 숙청되었다.
1952년12월 김일성은 「당제5차전원회의」를 소집하고「노동당의 조직적사상적강화는 우리당의 승리의기초」라는 제목으로 남노당계숙청을 위한 포문을열었고, 숙청책임을 박창옥(당부위원장·56년 숙청당함)에게 부여하였다.
1952년말부터 대대적인 남노당계검거선풍이 불었고, 53년8월 미국의「스파이」, 박헌영정부수립「쿠데타」계획등「죄목」으로이승엽 이강국 임화 조일명 박승원 배철 백형복 조정복 맹종호 설정식 이중업등 11명은사형, 김남천 윤순달은 15년형, 이원조10년형이 선고되었다.
박헌영은 이승엽일당이처형된후 2년4개월후인 55년12월5일 북괴내무성구락부안에서 비밀재판을 받고사형이 집행되었다.
한편 김일성독재확립에 또하나의 장애물은 소련에서 입북한공산주의집단이었다.
53년초 김일성은 우선「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시절부터「남북노동당합당」이후까지 조직부장에 앉아 있던「허가이」와 6·25사변당시 북괴군후방총국장을 지낸「김렬」에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역시죄명은「반동분자」였다(허가이는자살).
남노당계및 소련에서 입북한 소련제2세등을 숙청함과동시에 김일성은 당내에 남아 있는 연안파숙청에 착수했다.
북괴정권수립후 1952연10월까지「내무상」에앉아있던 박일우에대한 숙청을계획하고, 김일성정권전복계획을 꾸몄다는 증거를 조작하더니 54년3월「중앙당3월전원회의」에서「반당· 종파반역분자」로숙청하였다.
한편 북괴군창설의 유공자이며「이동영웅 칭호수상자」인 방호산도 박일우와같이 숙청되었다.
1956년2월 소련공산당제20차대회가「스탈린」격하를 결의하자 북괴정권내의 동향은 심상치않았다.
김일성이 소련및 동구제국을 순방하고 구걸교섭에 실패하자 이를계기로 맹렬한 반금공세를 폈다.
56년8월 당중앙위원회의에서 최창익(부수상)을비롯한 연안파와 박창옥(부수상)을 비롯한 소련파는 윤공흠으로 하여금 반금발언을 전개하여 김일성의 경제정책·우상화정책및 간부정책을 비난케 하였다.
이를계기로 김일성은 대대적인 숙청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8월종파사건」이다.
57년말까지 중앙당 또는중앙기관의 요인들을 대거숙청하였는데 이에 포함된주요인물로서는 북괴부수상겸 당정치위원 최창익(연안파) 동박창옥(소련파)을 위시하여 윤공흠(상업상·연안파) 김승화(건설상·소련파) 이필규(전내무성부상·연안파) 기석복(문화선전부상·소련파) 정 률(문화선전부상·소련파) 한 빈(도서관장·연안파) 이상조(주소대사) 장하일(민주조선주필·소련파) 이권무(북괴군총참모장·연안파) 김웅(민보성부상·대장·연안파) 최종학(북괴군총정치국장·소련파) 김을규(북괴육대총장·연안파) 장평산·김원봉(노동상·연안파) 허성택(우탄공업상·남노당계) 안복(문화선전부상·연안파)등80여명에 달하였다.
1958년3월 제1차당대표자회의는 최종적으로 전북괴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인 김료봉에대한 숙청을 단행하였는데본명은순안농목장노동자로 일하다가 1960년 처참한 여생을마쳤다.
그후 이들 숙청된자들과조그마한 연계라도있는 자라면 계속 숙청을 단행하였는데 59년에는 조훈(농업성부상) 한전종(농업상·국내파) 이병남(보건상·남노파)등이, 61년 이후에는김응기(적십자중앙위원장) 한설야(문예총위원장) 문만욱(경공업위원회위원장) 66년에는 김창만 (당부위원장) 이일향(하역상)등이 숙청되었다.
이렇게하여 중요정적이 제거되자 67부터는 김일성파에 속하면서도 두각을나타낸자(이들이야말로 김일성 독재확립의 유공자들임)들을 숙청하였다. 김일성파는이른바갑산파(갑산지하공작파)와 군사파(군사행동파)라는양파로구분할수있는데-. 67년5월에개최된당중앙위에서는 박금철(당정치위원겸 비서국조직담당 비서) 이효순(당정치위원겸비서국 대남공작담당비서) 고혁(부수상) 허석선(중앙당과학교육부장) 김도만(중앙당선전담당비서)등 수백명의 당료(갑산지하공작파)들이 숙청되었고, 이숙청은현재도 계속중에 있다.
이로써 김일성은 군사강경노선우선을 주장하는 군사파를 핵심으로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시켰다.
과연 이로써 북괴도당내의 숙청은 종료된 것일까?
지금 현재 진행중인 주민재등록사업만 하더라도 수백만의 북한주민들이 새로운숙청대상으로 지정되었다.
숙청이 곧 공산당의 생리작용일진데 김일성의 숙청은 이것으로 끝날리 없으며 더욱 계속될 것은 재언의 여지가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