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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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호 27면

강의가 있어 광주에 가는 길에, 암에 걸려 2년 전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요양하는 친구 집에 들렀다. 의학이 발달해서 암은 이제 독감보다 조금 더 무서운 정도라고들 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암이 발병한 후의 몸이 최적의 상태일 수는 없는 법. 그래서인지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금세 근심스러워졌다. 친구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차도 마신 뒤 시골길을 걸으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에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던 사람이 낙향해 심심하지는 않을까 염려돼 거기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뜻밖에도 친구는 여성인권사무소라는 곳에서 자원봉사를 한다고 했다. 처음 그곳에 쭈뼛거리며 찾아갔을 땐 사람들이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대하더니 직업이 변호사였다는 걸 밝히자 대환영을 해주더라나. 아무튼 건강상 이유로 휴직을 했으면서도 지금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법률 자문을 해주고 그런 가운데 많이 배우고 있다며 겸손해했다.

사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살짝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지금 친구의 상태는 남에게 자기 신세를 하소연하고 투정을 부려도 시원찮을 판국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남을 돕겠다고 마음을 내었으니 여간 장한 일이 아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이 많아 듣는 내내 속이 쓰렸다. 기억에 남는 사연 중 하나는 어느 다문화가정의 가정폭력과 관련된 얘기였다.

베트남에서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온 20대 젊은 여성이 나이 많은 남편의 폭언과 폭행에 매일 시달린단다. 남편은 걸핏하면 “내가 너를 얼마 주고 데려왔는데 똑바로 못 하느냐”고 말한다고 했다. 아내도 아이 엄마도 아닌, 그저 몸종 정도의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온갖 욕설은 물론이요, 걸핏하면 손찌검을 해대는데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남편이 때리면 도망이라도 가라"고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권유하는데도 베트남에서 온 아내는 묵묵히 그 모진 매를 다 맞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나도 속이 바싹바싹 타는 듯했다.

며칠 전엔 아내가 남편한테 맞아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당장이라도 그 집에 쫓아가서 나라도 그 남자를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날 친구는 베트남 여성의 집에 찾아가 남자에게 얘기 좀 하자고 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몰인정하고 몰상식했단 말인가. 정말 속이 상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아픈 친구보다 여성인권사무소에 접수된 이주 여성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더 마음에 맺혀 우울했다. 도대체 왜 사람이 같은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일까. 저나 나나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자식을 낳고 사랑으로 길러주며 한국에만 가면 잘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먼 나라로 시집온 사람 아닌가. 호강은커녕 험한 일은 다하면서도 고국을 향한 그리운 마음 한 번 내색하지 못한 채 꿋꿋하게 가정을 꾸려가는 고마운 아내가 아닌가. 부디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피부색과 언어만 다를 뿐,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원영 조계종에서 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아사리. 불교 계율을 현대 사회와 접목시켜 삶에 변화를 꾀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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