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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지원에 기대려다 기업가정신 퇴색 될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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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이상재
경제부문 기자

30일 오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는 200명 넘는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모여들었다. 한국무역협회가 이석근 롤랜드버거컨설턴츠 서울사무소 대표를 초청한 조찬회 자리다.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롤랜드버거는 1989년 독일 통일 당시 ‘통일 컨설팅’을 했던 것으로 유명한 회사다. 마침 이 대표는 전날 국민경제자문회의의 민간자문위원 30명 가운데 하나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날 강연 주제는 중소·중견기업 육성 방안. 유럽 위기 속에서 독일이 굳건한 것은 ‘경제 허리’를 담당하는 ‘미텔슈탄트(Mittelstand, 중견·중소기업)’의 경쟁력 덕분이다. 실제 독일에서 전체 기업의 99.5%를 차지하는 미텔슈탄트는 일자리의 70.9%, 법인세의 55.2%를 담당한다. 미텔슈탄트의 성공 요인으로 이 대표는 ▶정보 지원과 인력 양성 ▶적극적인 해외시장 개척 ▶장기적 관점의 금융 지원 ▶일자리 보호와 연계된 세금 감면 등을 꼽았다.

 누구도 ‘한국형 미텔슈탄트’ 육성이 필요하다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중소·중견기업계는 “우리에겐 ‘손톱 밑 가시’와 ‘운동화 속 돌멩이’가 많아도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과도한 규제와 행정 절차가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더 ‘화끈하게’ 지원을 해달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렇다면 독일의 미텔슈탄트엔 무엇이 장애물일까. 이 대표의 쓴소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미텔슈탄트들이 스스로 지목하는 가장 무서운 성장 장애물은 기업가정신의 약화다. 성장과 혁신을 가로막는 문제를 기업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늘 위기의식 속에서 살아야 가능한 일이다.”

 정부는 요즘 벤처 생태계 육성과 골목 상권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혹시 바로 지금이 우리 벤처·중소·중견기업들이 정부 지원에만 기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시대 착오적인 수동적인 기업 문화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위험을 감수하는 ‘정글 정신’을 잊은 건 아닌지 되짚어볼 때가 아닐까.

이상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