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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올스타전] 올스타 잡학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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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 홈 코트 어드밴티지 때문에 빼앗긴 슬램덩크 타이틀

지금도 하이라이트 필름에 종종 등장하지만 1988년 올스타 주간 행사로 벌어진 슬램덩크대회는 역대 어느 대회보다 박진감이 넘치고 끝까지 우승자의 향방을 점칠 수 없었던 명 승부였다.

당시 대회 2연속 우승을 노리던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은 결승에서 1985년 대회 우승자이던 도미니크 윌킨스(애틀란타 호크스)와 대결을 보였다.

두 선수는 예선과 결선에서 멋진 덩크를 선보이며 심사위원들과 관중의 넋을 빼놓았다.

결승에서도 각각 우열을 가리기 힘든 고난도 덩크를 선보여 동점을 이룬 가운데 슬램덩크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연장전에 들어가게 된 조던과 윌킨스.

윌킨스가 '윈드 밀'이라는 이름이 붙은 덩크 기술을 선보이며 성공하자 조던은 그 유명한 자유투 라인에서의 덩크를 시도한다. 관중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조던은 자유투 라인에서 점프를 시도했다. 그러나 덩크는 실패하고 말았다.

원래 규정대로 한다면 당연히 윌킨스의 우승으로 끝났을 경우. 하지만 당시 올스타 경기가 열린 곳은 다름 아닌 조던의 소속팀인 시카고 불스가 경기하던 '시카고 스타디움'이었던 것이 윌킨스에게는 불운으로 작용하고 만다.

홈팬들은 조던이 다시 한번 시도할 것을 소리쳤고 심사위원들도 이를 받아들여 그는 다시 한 번 자유투 라인에서의 덩크를 시도했고 결과는 성공했다. 음료수 회사의 광고에도 쓰일 만큼 유명한 이 장면은 바로 시카고의 팬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최종라운드에서 윌킨스 먼저 시도한 두 개의 덩크를 모두 50점 만점을 받았고 마지막 덩크에서 45점을 받았고 조던은 두 번의 덩크에서 모두 97점을 기록했으나 마지막 덩크로 역전에 성공해 우승을 차지 1987년에 이어 2년 연속 슬램덩크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조던의 자유투 라인 덩크는 50점 만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결국 아쉽게 2위에 그친 윌킨스는 당시 시도한 '윈드밀' 덩크로 1990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 올스타 유니폼에 얽힌 이야기

1996년 올스타 경기까지는 동부, 서부 올스타들은 서로 색깔을 구분해 하양, 빨강 또는 하양, 파랑으로 나뉜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1997년 올스타 경기부터는 이러한 별도의 올스타 경기 유니폼 대신 소속팀의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나오기 시작해 지난 시즌 올스타 경기까지 선수들은 소속팀의 유니폼에 올스타 로고를 새긴체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오는 10일(한국시간) 애틀란타에서 열리는 제 52회 올스타 경기에서는 6시즌만에 다시 예전의 올스타 유니폼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홈인 동부 올스타가 하양을 원정인 서부 올스타가 빨강 유니폼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한다.

1970년대 올스타 경기에서는 경기를 개최하는 해당 연고팀의 홈, 원정 경기 유니폼을 로고만 올스타로 바꾸어 선수들에게 입혔다. 예를 들어 1972년 올스타 경기가 열린 로스엔젤레스에서 홈인 서부 올스타 선수의 유니폼이 레이커스의 홈 경기 유니폼과 디자인이 동일했고 마찬가지로 원정팀인 동부 올스타의 경우는 레이커스의 원정 경기 유니폼을 입었던 것이다.

■ 올스타전에서도 트리플 더블을

1951년부터 선수 파업으로 단축시즌으로 치뤘던 98~99시즌을 제외한 51회의 올스타 경기에서 유일하게 트리플 더블의 기록을 세운 선수가 있었다.

매직 존슨, 제이슨 키드, 시즌 평균을 트리프더블로 달성했던(61~62시즌) 오스카 로버트슨도 아닌 바로 마이클 조던(40세, 198cm)이 주인공이다.

그는 1997년 2월 9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제 47회 올스타 경기에서 26분간 뛰며 14득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의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다. 올스타 경기 결과에서도 조던이 속한 동부 올스타가 132-120으로 서부 올스타에 승리를 거둬 조던의 MVP 등극이 유력했다.

하지만 정작 경기 MVP는 NBA 올스타전 역사상 전반전에 가장 많은 득점(24점)을 올린 기록을 세운 글렌 라이스(샬롯 호니츠)에게 돌아갔다.

■ 올스타 경기에서 파울 아웃을 당한 선수들

사실 정규시즌 경기나 플레이오프 때보다 올스타 경기가 다소 느슨한 것은 사실이다. 어차피 승부를 떠나(물론 승리 팀에게 주어지는 수당이 많기는 하지만) 참가하는 선수들도 즐기는 측면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수비를 하거나 무리한 공격으로 6개의 개인 파울을 범해 코트에 나오지 못하게된 불운한 선수들도 있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선수들일까?

▲ 1954년 올스타 경기에서 밥 웬저(로체스터 로열스)는 31분 간 18점, 5리바운드의 성적을 남기고 6반칙으로 퇴장 당했다.
▲ 1956년 폴 아르진(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은 28분 간 나와 13점, 7리바운드를 기록하고 6반칙으로 코트를 물러났다.
▲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중 한 명인 포인트가드 밥 쿠지는 1956년과 1961년 두 번의 올스타 경기에서 모두 6반칙으로 퇴장 당했다. 올스타 경기에서 2번이나 6반칙으로 퇴장 당한 선수는 그의 뒤를 이어 릭 배리(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가 물려받게 된다.
▲ 1959년 돌프 쉐이즈(시러큐스 내셔널스)도 13점, 13리바운드의 기록을 남긴채 6반칙으로 코트를 떠났다.
▲ 1962년, 1965년 올스타 경기도 1956년의 아르진, 쿠지와 같이 6반칙으로 퇴장 당하는 선수가 나온 올스타전이었다. 월트 밸라미, 리치 거윈(이상 시카고 패커스)가 1962년에 빌 러셀(보스턴 셀틱스)와 존 그린(뉴욕 닉스)가 1965년 경기에서 기록했다.
▲ 앞서 말한 릭 배리는 1966년과 1978년 경기에서 6반칙 퇴장을 기록했다.
▲ 1970년 카림 압둘자바(밀워키 벅스)가 기록했다.
▲ 가장 최근의 기록으로는 1987년 하킴 올라주원(휴스턴 로키츠)이 6반칙 퇴장을 기록했다.

■ 올스타 경기에서 무득점을 기록한 선수들

6반칙으로 퇴장 당한 선수들보다 더 운이 없었던 이들은 바로 올스타 경기에서 무득점을 기록한 선수들일 것이다.

NBA 농구 선수라면 꿈을 꾸는 무대인 올스타에 선발되었으나 정작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득점을 기록하고 말았던 선수들은 과연 누구일까? NBA 통산 개인 득점 2위에 올라있는 칼 말론(유타 재즈)도 무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2001년 올스타 경기에서 출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NBA 사무국 측이 징계를 내리겠다고 해 고작 2분 간 뛰는 둥 마는 둥 했었다. 말론의 경우와 달리 올스타 경기에 참가해 열심히 뛰었으나 점수를 올리지 못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말론은 2번이나 무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유독 클리블랜드 소속 선수들이 3명이나 무득점 기록을 갖고있는 점도 눈에 띠는 부분이다.

▲ 1953년 - 빌리 가보르(시러큐스 내셔널스)
▲ 1960년 - 척 노브(디트로이트 피스톤스)
▲ 1962년 - 프랜신 쉘비(LA 레이커스)
▲ 1965년 - 네이트 써몬드(샌프랜시스코 워리어스)
▲ 1967년 - 대럴 언호프(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1968년 - 데이비드 드부쉐어(디트로이트 피스톤스)
▲ 1971년 - 밥 커프맨(버팔로 브레이브스), 제오프 패트리(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 1972년 - 존 존슨(클리블랜드 캐발리어스), 톰 밴 아스테일(신시내티 로열스)
▲ 1973년 - 찰리 스코트(피닉스 선스)
▲ 1974년 - 오스틴 카(클리블랜드 캐발리어스)
▲ 1977년 - 조지 거빈(샌안토니오 스퍼스)
▲ 1983년 - 레지 테우스(시카고 불스)
▲ 1986년 - 로버트 패리쉬(보스턴 셀틱스)
▲ 1987년 - 알렉스 잉글리쉬(덴버 너게츠)
▲ 1988년 - 모리스 칙스(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1989년 - 브래드 도허티(클리블랜드 캐발리어스), 마크 이튼(유타 재즈)
▲ 1992년 - 오티스 도프(휴스턴 로키츠)
▲ 1993년 - 숀 캠프(시애틀 슈퍼소닉스)
▲ 1998년 - 제이슨 키드(피닉스 선스)
▲ 2000년 - 칼 말론(유타 재즈), 데이비드 로빈슨(샌안토니오 스퍼스)
▲ 2001년 - 칼 말론(유타 재즈), 게리 패이튼(시애틀 슈퍼소닉스), 앤소니 매이슨(마이애미 히트)

■ NBA 선수가 아니지만 3점 슛 대회에 참가했던 선수

1989년 올스타 주간 행사의 하나로 열린 3점 슛 대회에서는 NBA 소속이 아닌 선수가 참가해서 눈길을 끌었다.

주인공은 리투아니아 국가대표를 거치기도 했던 리마스 커티나티스(36세, 196cm).

그는 당시 크레이그 하지스, 데일 일리스, 레지 밀러 등 기라서같은 NBA의 장거리 슈터들과 함께 3점 슛 대회에 초청 형식으로 참가했었다.

1라운드 예선에서 그는 긴장한 듯 3개의 슛만을 성공시켜 총 9점을 올려 결국 2회전 진출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소련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NBA 팀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한 커티나티스는 결국 NBA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구 소련에서 독립한 조국 리투아니아 국가대표를 지내며 1996년 애틀라타 올림픽과 유럽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류한준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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