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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잔혹사…그 시절 유행 만들던 그 곳, 더 이상 없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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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청담동 커피미학.

아니, 잘나가는 청담동에 웬 잔혹사? 청담동 시대가 저물었네, 뭐네 말이 많아도 청담동은 여전히 서울, 아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동네입니다. 외국 럭셔리 브랜드가 한국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낼 때 1순위로 꼽는 장소가 청담동입니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카페와 레스토랑을 공급하는 곳도 청담동이죠.

그런데 무슨 이유로 잔혹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1990년대 중반 청담동을 자주 찾았던 사람이라면 아마 무슨 말인지 아실 겁니다. 그 시절 청담동엔 소위 ‘청담동 문화’라고 불러도 될 만큼 독특한 그 곳만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문화인·연예인·일반인이 뒤섞여 한국 같지 않은 한국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청담동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청담동에선 그 시절 그 느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청담동이 처음 수입했던 테라스 있는 카페와 브런치, 퓨전 음식과 수십 종에 달하는 커피 메뉴는 전국 각지로 퍼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청담동에 그런 세련된 ‘신(新)문물’을 소개했던 트렌드세터는, 그리고 그들이 만들었던 명소는 대부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습니다. 유행 첨단을 걷던 하루에와 카페 드 플로라, 시안, 커피미학, 그리고 궁이 20년도 채 안 돼 일제히 퇴장한 모습, 이게 잔혹사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 시절 유행 만들었던 그 곳, 더 이상 청담동엔 없다
美·日·佛 외식문화 국내에 처음 수입했던 카페·레스토랑
1990년대 중반엔 청담동이 제일 핫(hot)했다. 지금은 서울 아무데서나 창문을 열어젖힌 테라스에 앉아 브런치를 즐기고, 에티오피아산(産) 원두를 내린 커피를 마시며, 다양한 식문화가 뒤섞인 퓨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주차장 없는 곳에 가도 발레파킹 서비스를 받으면 되니 웬만해선 주차 걱정도 안 한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이런 ‘특권’은 청담동에서만 누릴 수 있었다. 그 시절 청담동 스타일, 아니 좀 더 거창하게 말해 이런 청담동 문화를 이끌던 건 당시 청담동 골목에 자리잡았던 하루에와 시안, 카페 드 플로라, 커피미학, 궁이다.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무슨 사연을 안고,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배짱이의 여행스토리 http://www.1978mm.com

시안
퓨전 레스토랑의 시작, 20대 사장을 유명인사로 만들다

퓨전요리가 양념치킨만큼이나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어딜 가나 메뉴엔 ‘만다린 소스와 과일 샐러드를 곁들인 영계 튀김’이라든가 ‘만두피 튀김을 곁들인 오징어 튀김 샐러드’ ‘버섯 크림소스를 곁들인 오리와 버섯을 넣은 사천식 팬케이크’ 같은 다양한 지역 음식을 뒤섞은 메뉴가 넘쳐났다.

 

이러한 트렌드의 출발점이 바로 1998년 문을 연 청담동 시안이었다. 남성잡지 ‘맨스헬스’의 백승관 편집장은 “당시 20여 가지가 넘게 적힌 메뉴판을 보면 도대체 어떤 맛이 나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지만 그 자체로 흥미롭고 즐거웠다”고 말했다.

 미니멀한 느낌의 검은색 건물 외관 안으로 들어서면 한층 더 세련된 인테리어가 펼쳐져 찾는 이를 놀라게 했다. 연인들의 특별한 데이트 장소로도 애용됐던 건 국내에 처음 선보인 퓨전요리 못지않게 이 같은 인테리어가 더 큰 역할을 했다.

  시안을 오픈할 때 불과 28세였던 이상민 대표도 그의 레스토랑만큼 화제를 몰고 다녔다.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코넬대 호텔경영학과)이라는 학벌에다 일본계 미국인 주방장을 스카우트해 미국에서 붐을 일으키던 최신 퓨전요리를 선보인 앞선 감각이 더해져 그는 당대 ‘청담동 스타일’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됐다. 이 대표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럭셔리 브랜드 양복으로 꽉 찬 옷장을 공개하는 등 화제를 뿌렸다. 당대 최고 여배우와 염문설이 날 정도였다.

  그는 2000년대 후반까지 ‘리틀 시안’이라는 세컨드 브랜드와 일식퓨전레스토랑 ‘타니’, 멕시칸 요리점 ‘타코 팩토리’ 등 다양한 브랜드를 론칭하며 승승장구했다. 2007년에는 서울 강남 파이낸스센터에 자신이 론칭한 세컨드 브랜드만 모은 ‘유니온스퀘어’를 오픈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부터 자신의 브랜드를 하나 둘 정리하고 2011년에는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어 준 청담동 시안까지 문을 닫았다. 인근의 한 부동산 관계자는 “몇 년 전부터 경영에 어려움을 겪더니 폐점 1년 전쯤 ‘차이니즈 비스트로’라는 컨셉트로 리모델링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현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있는 ‘리틀 시안’과 롯데백화점 에비뉴엘점에서 ‘타니’를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이 대표는 거절했다. “밤새 고민했는데 언론에 나올 때는 아닌 것 같다”고 측근을 통해 전했다.
청담동 황태자의 흔적 찾을 길 없어

커피미학 제공

커피미학
헤이즐넛이 전부이던 시절 전세계 원두 커피를 맛 보다

커피미학은 1998년 4월 한국계 일본인 나가하마 요시코(57·여)가 연 카페다. 예쁜 서양식 주택에 정원까지 있어 운치 있던 커피미학은 나가하마가 평소 꿈꾸던 커피하우스 모습 그대로 지은 건물이다.

 

많은 한국인은 스타벅스의 국내 진출 이후에야 비로소 커피에도 다양한 메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커피미학은 스타벅스가 1호점을 내기 1년 전부터 이미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케냐 AA·콜롬비아 수프레모 등 다양한 원두커피를 팔았다. 배우 예지원씨는 “당시만 해도 커피는 프림커피와 블랙커피가 전부였고, 강남에서 멋 좀 부린다는 사람 정도가 헤이즐넛 커피를 마셨을 때라 커피미학에 가서 커피 메뉴를 보고 커피 종류가 너무 많아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스타벅스는 열광적 환호 속에 한국에 상륙했지만 커피미학은 달랐다. 나가하마의 회고. “개업 후 2년은 불평을 참 많이 들었어요. 대부분 커피가 왜 이렇게 쓰냐, 십전대보탕 내온 거 아니냐 같은 말이었죠. 한 잔에 5000원인 비싼 커피값도 문제였어요. 강남 주부들이 커피 마시러 왔다가 무슨 커피가 밥값보다 비싸냐고 다들 한 말씀씩 했으니까요.”

 하지만 차츰 청담동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나가하마는 “유명 연예인들이 꼭 찾아오는 유명한 가게가 됐다”며 “라디오에서 가수 보아가 ‘한가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청담동 커피미학에서 커피 마시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유명세를 타자 여기저기서 동업하자는 권유가 이어졌다. 인사동에 2호점을 냈고, 롯데백화점 본점에도 입점했다. 하지만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구두로 10년 계약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백화점 측이 계열사 프랜차이즈 커피점을 입점시켜야 한다고 해서 쫓겨났어요.” 나가하마는 백화점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지만 결국 패소했다. 구두약속은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인사점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이번엔 그의 국적이 문제였다. “일본 여자가 감히 인사동에서 일본 커피 판다고 노인분들이 항의하더군요. 상인연합회도 저를 눈엣가시로 보고… .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권리금도 제대로 못 받고 나왔어요.”

 분신처럼 아꼈던 청담점도 2010년 문을 닫았다. 치솟는 임대료를 버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커피미학은 동부이촌동에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한 상가건물 4층에 있는데 청담동과 비교하면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작은 공간이다.
동부이촌동 상가 4층서 명맥 유지

이주헌씨 제공

하루에
브런치와 와플, 아메리칸 스타일 시작되다

“청담동을 다녔던 사람들 중 여기 얽힌 추억 하나 없는 사람은 없을 걸요.”

 청담동에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는 디자이너 장광효씨는 “연예인·일반인 할 것 없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봐야 하는 청담동의 필수 코스였다”고 회상했다.

 

1996년 청담동의 고급 주택가에서 문을 연 카페 하루에 얘기다. 이곳은 당시 다른 카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클래식한 느낌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화제가 됐다. 하루에 관계자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조명은 물론 커피잔이나 티스푼 등 식기도구까지도 전부 해외 유명 브랜드 제품을 쓴 곳은 하루에뿐이었다”고 말했다. 뮤지컬 연출가 이지나씨는 "카페라기 보다 고급 다이닝 바 같았다. 화려한 인테리어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서 뮤지컬 ‘록키호러픽처쇼’의 사진 촬영을 여기에서 했다.”고 회상했다.

 하루에가 인기를 끈 건 인테리어뿐 아니라 당시 생소했던 메뉴가 큰 역할을 했다. 아이스크림과 과일을 첨가한 와플이나 미국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브런치를 시도해 젊은 여성을 사로잡았다. 발레리나 강예나씨는 “당시 압구정동 카페들은 가격만 비쌌지만 이곳은 우리와 다른 외국 식문화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며 “여기서 브런치를 먹으면 마치 외국에 와 있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때 청담동의 가장 유명한 명소였던 하루에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1996년 하루에가 시작된 장소는 옷가게로 바뀐 지 이미 오래 됐고, 맞은편 건물 1층에 있던 2호점인 그랜드 하루에도 지난해부터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은 상태다.

 14일 찾아가 봤더니 그랜드 하루에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그대로였지만 유리창에는 ‘임대’라는 굵은 글씨가 적혀 있어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맴돌았다. 건물주는 “카페는 지난해 문을 닫았는데 아직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비어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유리창 안으로 들여다보니 진한 빨간색의 테라스 천장에 적힌 Harue라는 글씨도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하루에의 주수암 대표는 지난해 간암 수술을 받고 현재는 휴양 중이다. 함께 하루에를 운영했던 동생 주동율씨는 “다른 일을 모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을씨년스런 '임대' 명패만 남아

카페 드 플로라
청담동에 발레파킹 시대 열다

 

“외관부터 달랐다. 시원한 통유리창 밖에는 테라스가 있었고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돼 있어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 한 번씩 쳐다봤다. 당시만 해도 카페는 주로 2층에 있었고 다방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마치 미국이나 유럽의 노천카페 같았다.” 뮤지컬 연출가 이지나씨는 청담동 카페 드 플로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회상했다.

CF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린 김용호씨가 1997년에 문을 연 이곳은 가수·영화배우·패션모델 등 유명인사들이 빈번하게 출입해 청담동을 ‘핫 플레이스’로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정재·김민종·이미연·전도연 등 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스타들이 하루에나 카페 드 플로라에서 앉아 편하게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특별하면서도 특별하지 않은 청담동의 일상적 풍경이었다. 2000년대 초반 이 곳에서 종종 모임을 가졌다는 백민주(35·여) 씨의 회고. "청담동, 특히 카페 드 플로라나 하루에에서는 모두들 연예인이 왔다고 ‘우와’하는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그냥 일반인 보듯이 눈길 한 번 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했다. 그렇게 하면서 나도 특별한 그룹의 일원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청담동 카페·레스토랑에 발레파킹을 처음 시작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용호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CF 사진활동을 활발히 할 때이다 보니 같이 작업하던 유명 연예인이 많이 찾아왔어요. 카페에 와서 시간은 편하게 보내더라도 카페에 올 때까지 거리를 걸어다니기는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카페 앞까지 차를 타고 올 수 있도록 발레파킹을 해줘야겠다고 처음 생각했어요. 물론 청담동 골목에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했죠.”

 발레파킹은 금세 청담동의 대부분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퍼졌다.

 김씨는 2000년 카페를 가수 싸이 엄마이기도 한 레스토랑 사업가 김영희씨에게 넘긴 후 인근에 AOC라는 와인바를 새로 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현재는 본업인 사진에 전념하고 있다. 카페 드 플로라는 2000년대 중반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는 얼마 전까지 서미갤러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일반 사무실로 바뀐 상태다. 김영호씨는 “프랑스의 카페 마고나 카페 드 플로라처럼 100년 이상 가는 문화공간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불과 10여 년 만에 사라졌다는 게 참 안타깝다”며 아쉬워했다.
꿈꾸던 문화 공간 자취 감춰

레스토랑 궁의 내부모습(왼쪽), 영화 `정사` (1998년)의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맛보다 인테리어로 앞서다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큰 통유리 안으로 하얀색의 큰 기둥과 많은 전구를 이어붙여 만든 전등 등 독특한 인테리어로 큰 인기를 끌었던 퓨전 레스토랑이다. 당시 패션모델로 활동했던 박성목(42)씨는 “음식보다도 이곳 인테리어를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 결혼식 장소로도 이용될 정도였다”며 “이때부터 청담동 레스토랑들이 인테리어에 투자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곳은 인기 드라마 ‘겨울연가’와 영화 ‘정사’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궁은 한식을 기본으로 한 각종 퓨전요리를 선보였다. 된장소스를 바른 치킨 샐러드·고추장 양념을 한 새우구이 같은 메뉴다. 궁을 열었던 노희영 CJ 전략담당상무는 당시 미국 명문대 의대 출신 단추 디자이너로 더 유명했던 인물이다. 지금은 인기 케이블TV 프로그램인 ‘마스터 셰프 코리아’에 출연하는 등 식음료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궁은 곧 다른 사업자에게 넘겨진 이후 2010년 폐업했다.

 당시 궁 지배인이었던 이상훈씨는 국수 전문점 ‘스토브’를 창업해 청담동 성공 신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는 스토브의 성공에 힘입어 ‘마미스 키친’ ‘스파이스 스토리’ ‘아지노구니 노부’ 등 4개 브랜드를 론칭하고 전국에 40여 개의 매장을 여는 등 성공한 외식업체 CEO로 각광받았다. 기업 대상 성공 비법 강연회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2011년 부도를 낸 후 잠적한 상태로 알려졌다. 그와 동업했던 인사는 “그가 필리핀으로 갔다고 전해들었다”고만 말했다.

'맛' 보다 '멋' 보던 시대 저물다

글=안혜리 기자 유성운·조한대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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