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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들의 희망, '위대한 똥말' 차밍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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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해준
문화스포츠부문

잘난 것 하나 없는 말 한 마리가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다. 뛰어도 뛰어도 1등을 하지 못한 말. 96차례 경주에 출전해 한 번도 우승을 못한 말. 한국경마 최다연패 기록을 세운 8세 암말 차밍걸이 그 주인공이다.

 차밍걸은 26일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제6경주에 출전했다. 중반까지 11마리 중 꼴찌로 달리던 차밍걸은 결승선 앞에서 2마리를 제치고 9위로 골인했다. 1등은 못하지만, 꾀부리지 않고 끝까지 뛰어 좀처럼 꼴찌도 안 하는 차밍걸의 성실함이 드러난 경주였다. 그동안 차밍걸이 거둔 최고 성적은 3위(8회)이지만, 최하위는 2번밖에 하지 않았다.

 차밍걸처럼 우승 확률이 낮은 말을 경마계에선 ‘똥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똥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각박하고 피곤한 세상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모습에 공감해서다.

 차밍걸은 마주가 빚 대신 떠안은 말이다. 체구도 작다. 출생도, 스펙도 보잘것없다.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그 어떤 말보다 성실하고 튼튼하다는 것이다. 보통 경주마는 한 번 달리면 한 달 쉬고 다음 경주에 나선다. 특급 경주마는 제주도로 휴양을 가는 등 한 달 반씩 쉬기도 한다. 반면 차밍걸은 잔병치레가 없고, 회복이 빨라 한 달에 두 번 경주에 나서곤 했다. 다른 경주마보다 1.5~2배 정도 더 일을 많이 하는 셈이다. 남들 8시간 일할 때 12시간이나 16시간 일해서 먹고사는 서민들의 삶과 닮은꼴이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차밍걸의 팬 최영일씨는 “힘들 때 차밍걸이 열심히 달리는 걸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차밍걸을 똥말이라 부르지 마라. 차밍걸이 똥말이면 나 같은 소시민은 모두 똥말”이라고 말했다.

 요즘 차밍걸을 둘러싼 가장 큰 고민은 은퇴 후 진로다. 사람으로 치면 차밍걸은 40대 정도다. 현역에서 물러날 때가 지났다. 가장 좋은 건 씨암말이 되는 것이다. 암컷 경주마 중 씨암말이 되는 건 30~40% 정도다. 성적이 나쁘면 2세도 가질 수 없는 게 냉정한 경마의 세계다.

 시장 논리에 맡긴다면 차밍걸의 성적으로는 씨암말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차밍걸의 성실함과 투지에 반한 팬들의 생각은 다르다. 최씨는 “일본에서도 113연패를 한 ‘하루우라라’라는 말이 있었다. 국민적 관심을 받게 돼 일본 최고의 씨수말과 교배해 2세를 얻었다. 차밍걸도 자마를 낳고, 그 말이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위대한 똥말’ 차밍걸은 충분히 박수 받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 차밍걸이 훌륭한 2세를 낳기를 바라는 마음속에는 ‘자식은 나보다는 잘됐으면’ 하는 소시민들의 바람이 녹아 있다.

이해준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