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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조지훈씨가 17일 세상을 떠났다. 10여년내의 숙환이던 기관지천식이 끝내 그를 앗아갔다.
그분은 최근엔 불과 몇마디의 말도 잇지 못하고 쿨룩거렸다.
전화받는 일조차 호흡이 가빠 사양했다.
『오늘날 주사앨가도시인은 옷자락을 스치기힘들다. 터분히 마주앉아 막걸리잔조차 나누기 힘들어졌다. 시인들의 소외는 시인들끼리만은 아니다. 오늘날 시를 읽으려는 독자는 아무드없다.』
작년 7월 「한국신시60년기념사업회」를 발기하는 자리에서 그는 퍽 「페이서스」에 넘쳐 있었다. 시인들의 적적함과 외로움은 비단 시인들 전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심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만년은 이처럼 쓸쓸했다.
한국신시의 면면한 맥박을 이어주었던 1930연대의 청록파시절은 그의 황금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당시의 세 문학청년(목월·두진등)은 지금 고인의 자택인 성북동 개울가의 그 기와집 사랑채에 모여, 밤이 늦도록 민족정신을 이야기하고, 한국의 고유한 전통에 탐닉해있었으며, 잊혀져가는 우리의 고전적풍습에 연연해 있었다. 『자연은 청록파의 마지막 구원을 희구한 신이었다』는 말을 고인은 최근에 한적이 있었다.
그가 한때 자연에 몰입해 있었던것은 암담한 현실을 비관하고 탄식하고 있을수 없었던 일종의 구원의 길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의 그 암흑을 내면에서 밝혀준것은 웅변가도 애국지사도 아닌 그당시 몇몇 시인들의 조용하고 눈물겨운 음성이었다.
『비록 이 시대와 사회, 그 민족과 국가가 시와 시인을 버린다해도, 시인은 언제나 이 시대와 사회를 지키고 제민족과 조국의 정의를 드높인다.
이것은 그의 깊은 신념이었으며 언젠가 이 살벌하고 건조한 세상에 「시의중흥」이 가능할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오늘의 침체에서 떨치고 일어나 잃어진 시의 권위를 탈환하며 미래의 빛나는 설계를 이룩함으로써….』
그러나 그분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 숨가쁜 소망도 이루어지기전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젠 그분의 기침소리조차 사라지고, 낭랑한 시들만이 우리를 위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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