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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68) 하버드대 유람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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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건 전 국무총리가 2005년 5월 16일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이 주최한 세계 주요 정치지도자 초청 포럼에 참석해 ‘한·미 관계의 미래와 북한 현황’을 주제로 강연했다.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뒤 1년 만에 공식 활동에 나선 그는 17대 대통령 선거(2007년 12월) 유력 주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사진은 강연을 마친 고 전 총리에게 학생이 질문하고 있는 모습. 청중석 앞에서 셋째 줄 맨 왼쪽에 당시 하버드대 학생이었던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앉아 있다. [사진 고건 전 총리]

농수산부 장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2개월이 지난 1982년 5월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이 터졌다. 그 여파로 정부 쇄신 차원의 전면 개각이 이뤄졌다. 5월 21일 모내기 현장으로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라디오로 내가 농수산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전에 청와대에서 연락은 없었다. 어찌나 황당하든지.

 20년의 공무원 생활이 끝나자 섭섭함과 함께 시원함이 밀려왔다. 늦은 나이긴 했지만 세계를 호흡해야겠다는 생각에 그해 미국 하버드대에서 객원연구원(visiting fellow) 생활을 시작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겔, 『문명의 충돌』 저자 새뮤얼 헌팅턴, ‘소프트 파워’의 주창자 조셉 나이 등 유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훗날 다시 국정을 맡았을 때 이들로부터 배운 지식은 소중한 자산이 됐다.

 하버드대에서 마주친 사람도 적지 않다. 중고가구를 구하러 시내에 다니다가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에서 최고경영자과정(AMP)을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던 이헌재 전 재무부 심의관(전 경제부총리)을 만났다.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받던 한덕수 상공부 과장(현 한국무역협회장)과는 하버드 야드에서 마주쳤다. 조셉 나이 교수의 국제정치 강의실에선 반기문 외무부 과장(현 유엔 사무총장), 최홍건 상공부 과장(전 산자부 차관) 등과 함께 했다. 먼 타국에서 한국인, 그것도 같은 행정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반가웠다. 21년이 지나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와 장관으로 대통령 탄핵 소추라는 초유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게 될 줄은 그때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복권된 김대중씨(전 대통령)가 나보다 6개월 늦게 하버드대에 왔다. 하지만 그와 하버드대 캠퍼스에서 마주친 일은 없었다.

 하버드대 안에서 거의 매주 세미나가 열렸다. 경제 관련 세미나에 가면 “한국은 경제성장의 모범사례”라며 칭찬을 받았다. 정치 관계 세미나에 가면 정반대였다. “민주화 후진국”이라고 비판받았고 한국 정치가 도마에 올랐다.

 한 번은 내가 새마을운동에 대해 주제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벌어졌다.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경제개발운동”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다양한 세미나에 참여하며 나의 공직생활을 되돌아보게 됐다. 한국 행정의 흐름을 정리하는 기회도 됐다. 우리나라 정부·행정이 걸어온 3단계 발전 과정을 나는 이렇게 구분한다. 우선 60~80년대는 개발행정에 의한 산업화 시대였다. 이 시기 나는 새마을운동·치산녹화·식량증산에 젊음을 바쳐 일했다. 80~90년대는 정치·행정의 민주화가 열린 시기였다. 나는 국회의원·임명직 서울시장과 김영삼 정부 총리로 정부의 민주화에 참여했다. 그리고 새천년인 2000년대 거버넌스 시대에 들어서서는 민선 서울시장, 노무현 정부 총리, 그리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국정을 수행했다.

 공직을 마친 후 2005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 포럼에 초청돼 한·미 관계에 대해 연설했다. 22년 전 강의실에서 본 에즈라 보겔 교수가 좌장을 맡아 하버드대 패컬티 클럽에서 극진한 오찬 간담회를 베풀어줬다. 그 자리에서 20여 명 하버드대 교수들로부터 한국 경제와 정치에 대한 극찬을 들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한국 행정 또한 한걸음 한걸음 발전해 왔다. 그 변화를 1983년과 2005년 하버드에서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전두환 대통령의 인척이던 사채업자 장영자씨가 남편 이철희씨와 함께 저지른 어음사기 사건. 장씨는 재무상태가 나쁜 건설업체에 돈을 빌려주고 대신 그 금액의 2~9배에 이르는 어음을 받았다. 이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돈을 챙기는 수법을 썼다. 장씨 부부가 1981~82년에 사기를 친 어음 액수는 6400억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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