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무아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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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가강 만족감을 준 경험은 가장 힘들었고 하기 싫었던 일, 두려웠던 일들을 해치웠거나 도저히 참아 낼수 없다는 고비를 이겨냈을 때이다.
이른바 「challenging」에 해당되며 우리말에서 찾자면 도발적 또는 시련적이라는 낱말이 여기에 알맞지 않을까.
이러한 경험을 겪고 나면 더 큰 시련을 이겨낼 자신을 갖게 되는 수도 있고 반대로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물러서는 수도 있겠다. 사람이 꺾느냐 꺾이느냐 하는 고비이며 영어에서는 성년과 미성년을 판가름하는 고비라는 표현도 쓴다. 두 갈래 길에 섰을 때 힘드는 쪽 길을 택하라는 말도 아마 이런 뜻에서 하는 말이리라.
내 자신에게 가장 하기 싫었던 일, 힘들었던 일이 무엇이었던가를 되살려 보자면 시험공부와 밤에 실험하러 다시 연구실에 나가던 일, 그리고 연구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들인 것 같다. 절차적인 것이 아니라 며칠을 두고 계획하고 준비는 해 놓았으나 10여 시간 동안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시켜야 될 실험들이라 늘 한밤중을 고르게 되곤 했다. 실험을 시작할 때의 기분이란 마치 힘든 산행에서 점심 먹고 휴식하고 난 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다시 한 걸음 내디딜 때 느끼는 기분이다.
의지력으로 억지로 한 걸음을 내디디고 나면 다음에는 체력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더 참기 어려울 만큼 육체적인 고통이 커져간다. 이 단계를 벗어나면 일종의 혼수상태와 비슷한 무아경에 도달한다. 왜 무엇하러 여기 서 있는가 저주스럽기 조차하다.「마라톤」주자가 근육의 고통에서 해탈되었을 때의 경지, 고산에서 고행하는 수도승이 겪는 경지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심혈 끝에 영감이 떠오르는 것도 이런 경지에서가 아닐까. 단편적이고 찰나적이나마 영겁과 대결하는 경지다. 길고긴 지루했던 실험이 거의 다 끝나서 밝아 오는 새벽 하늘을 내다보면서 수고 많이 했다고 스스로 달래는 만족감. 두텁게 싸인 실험 결과속의 혼돈안에서 규칙성을 찾아냈다는 기쁨과 이 보고가 인쇄되어 활자로 나온것을 되씹어 감상하는 만족감이 나에게는 내 자신의 일부분이 되어 오랫동안 간직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침체상태에 빠져 있다고 느낄 때마다 지금 가장 힘드는 일,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무엇인가를 캐보곤 한다. 어렵고 힘든 일에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 항상 나를 쇄신시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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