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나물에 입맛돋워 겨울을 보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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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겨우내 입맛을 돋아주던 김치맛도 이젠 시어서 먹기에 지겨워졌다.
여수 부둣가에서 이월선 할머니(68)는 김치독을 바닷물로 씻고 있었다. 『겨우내 반식량은 되던 김치도 이젠 다먹었지라우.』『빈독은 씻어서 뭣에쓰나요?』『아 그거몰라요? 젓을 담그지요.』 양지바른곳엔 벌써 파릇해진 새싹이 돋아나고 냉이며 쑥이며 산나물이 김치대신 입맛을새롭게 해줄때도 멀지않았다.
바닷 바람은 아직차지만 봄멸치잡이 채비에 바쁜 부두엔 뱃고동 소리가 활기를 띠고있다.
겨울이 물러가는 길목에서 다가오는 계절의 입김을 숨쉬는 삶들과 함께 겨울을 씻는 할머니의 마디진 손끝이 빨갛게 얼어들었다.
그많은 나날을 살아오면서 겨올,봄,여름,가을을 맞고 보낸 추억속에 담겨진 숱한 사연들과 함께 김치독을 씻는 할머니의 봄은 나날이 새로운 것이었을까? 아들과 손자들은 봄멸치잡이 채비차리느라고 일쩍 나갔고 며느리는 홍합따러 갯가에 나가 텅빈 집안에 혼자 앉았기가 심심해서 김치독을 손질했다.3월에 들어 봄멸치가 풍어이면 한해의 고기잡이는 내내풍어의 징조라고-. 봄멸치새우가 다른고기잡이 밑천이되기 때문. 새우는 낚시밥이 되고 멸치는그물낚시등 어구장만의 돈을마련한 단하나의 길이된단다.할머니는 김치독에 김치대신 멸치가 가득 담겨지기를 빌면서 손가락이 빨갛게 된것도 잊고 독을 씻고 또 씻고있다.
독에는 할머니의 말 못할 사연들이 서려있다. 할머니의 나이만큼 긴 세월을 가을에는 김장,봄에는 멸치를 담가 계절을 짚고 살아왔다.
할머니는 말없이 봄을 담글 겨울을 씻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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