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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키드먼은 우리 부부에게 '그 호주 여배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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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호주 여배우 니콜 키드먼은 우리 부부에겐 아킬레스건이다. 이름을 사흘이나 기억 못해 끙끙댄 아픔이 있다. 그 답답함이란. 사흘 만에 간신히 떠올렸지만, 지금도 가끔 애를 먹곤 한다. 하지만 그 뒤 한 가지는 좋아졌다. 우리 부부에게 ‘니콜 키드먼 불통’의 답답함은 사라졌다는 거다. 내가 “아 거 있잖아. 우리 사흘씩 기억 못했던 그 호주 여배우” 그러면 아내도 “아~. 그 여배우” 한다. 부부는 이제 안다. 이름이, 영화 제목이 안 떠올라도 그냥 안다. 누굴 말하는지.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젠 ‘착하면 척’이다. “아, 거 있잖아. 호주 여배우.” “아~. 그 여배우.”

 어디 아내뿐이랴. 얼마 전 비슷한 ‘소통’을 아들과도 했다. 출근길 갑자기 어떤 노래가 생각났다. 제목도, 가수도 몰랐다. 가사·리듬도 안 떠올랐다. 하지만 아내는 금세 알아들었다. “아, 그거. 아들이 요즘 샤워할 때 부르는 노래.” 아들에게 전화했다. “봄날인데, 그거, ‘며~’ 하는 노래. 네가 화장실에서 부르는 거.” 아들은 단박에 “봄바람 휘날리 ‘며~’. 벚꽃 엔딩요?” 한다. 그 뒤 이 노래 역시 ‘착하면 척’이 됐다. “화장실, 그거” 하면 “벚꽃 엔딩”이다. 화장실에서 지겹도록 아들은 부르고 부모는 들은 덕이다.

 맬컴 글래드웰은 순간 판단 능력을 ‘첫 2초의 힘’이라고 불렀다. ‘척하면 척’, 그게 세상을 꿰뚫는 힘이라며.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책 『블링크』에서다. 그는 “순간 판단 능력을 만드는 건 경험”이라고 했다. 축구선수를 예로 들었다. “훌륭한 선수는 놀랄 만큼 빠른 시간 안에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공을 어디로 찰지. 수천, 수만 시간 축구를 ‘경험’했으니까. 하지만 일반인은 불가능하다.”

 듣고 보니 순간 판단 능력, 별게 아니다. ‘니콜 키드먼’ ‘벚꽃 엔딩’이 바로 그거 아닌가. 옆에서 아내가 거든다. 요즘 아줌마끼리도 그렇단다. 친구끼리 만나면 ‘그거’ 하나로 만사형통이란다. 누가 “그거 있잖아, 그거” 하면 다른 아줌마가 “그래, 그거”로, 또 다른 아줌마가 “그게 그거지?”라며 받는단다. ‘그거’는 그때 그 밥집이요, 몇 년 전 같이 봤던 영화며, 엊그제 함께 먹었던 팥빙수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대화가 이리 암호문이냐며 기겁할 일이다. 그래도 아줌마끼린 상관없다. 이름·장소 몰라도, 제목 기억 안 나도 ‘그거’면 충분하다. 대화·소통 다 된다. 경험의 힘, 인연의 힘이다. 가족 같아진 것이다.

 그렇다. 한솥밥 먹는 거, 아무 인연으로 안 된다. 쌓이고 얽혀야 비로소 가족이다. 갈수록 떨어지는 총기(聰氣) 때문에 속은 상하지만 ‘그거’ 하나면 답답하지 않은 것, 충분한 것, 다 가족이라서다. 가족의 달, 5월이다.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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