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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문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소설|최인훈 <작가>
「외길」(유우희·현문12)을 읽은 인상은 예의바른 슬픔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슬픔은 어떻게 표현되든 간에 슬픈 일임에 틀림없다면 동정심을 일으키게는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좋은 소리도 잦으면 귀찮다는 것도 사실이다. 잦은 경우보다 더 민망한 것은 슬픔의 표현에 너무 억제가 가해지지 못했을 경우라 하겠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도 남자다운 억제력의 결여나 여자다운 은근함이 모자란 표시로 민망스러운 일이다.
자기의 아픔을 되도록 남 보기에 흉하지 않게 가리는 애의, 남의 아픔을 되도록 조심조심 다루는 보살핌-행동에 있어서의 이 같은 세련됨이 넓은 뜻에서「문화」라고 부르는 것일게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대하고 있고 그런 작중 인물들을 작가 역시 그렇게 대하고 있다. 「풀러트」의 진행도 완만하고 조용하며 문체는 완곡하고 여러 겹의 굴곡을 지니고 있다.
『그는 황선생이 지금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는 창 밖에서의 일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창밖엔 변두리에 속하는 서울시내의 일부가 한기를 섞은 석양에 으시시 떨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맞은편 산기슭의 판자촌 일대론 벌써 까무레한 저녁 빛이 내리고 있었다. 굽어볼 필요도 없이 눈만 내리깔면 가능한, 텅 빈 운동장엔 한산한 바람만이 일고 있는데 어쩌면 가시철조망을 넘어 들어온 동네 조무라기들이 오늘도 그 한편 모퉁이에 있는 포플러나무를 올려다보며 손가락질이라도 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황선생은 그 어린아이들이 며칠 전에 피우다가 얹힌 채 꺼내지 못하여 이젠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된 가오리 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어쩜 방과후에 일어난 그날 그날의 일을 종합해보면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황선생이 그 자신처럼 창가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될 서글픈 사실이 그 내부에서 싹트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없이 착잡한 표정으로 이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것은 작품의 첫 부분이다. 두 인물과 그 배경이 「그」에서 「황선생」으로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는 서술의 「리듬」 속에서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주로 창 밖의 동경을 서술한 부분이 ① 「그」의 마음속에 있는 공간이면서 ②또 「황선생」이 보고 있으리라고 「그」가 추측하는 상상의 공간이며 ③실지 두 사람의 밖에 있는 공간이기도 하며 ④마지막으로 이 이야기의 기조를 이루는 분위기의 질을 정해주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게- 그렇게 세 겹의 균형을 보여주고 있는데서 오고있다. 「가오리연」은 이 네 개의 인력이 지배하는 자장 안에 확실히 놓여있으며 그 확실함이 아름답다. 이 같은 기술적인 성공은 이 소설의 소재에 있다고 생각된다. 교사라는 직업.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높을 것이 기대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기 때문에 슬픔의 이 같은 완곡함이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말이다. 괴로움도 많고 박한 보수에 불만도 많을 사람들이 그 환경 속에서 이만큼 점잖게 슬픔을 처리해 보여주는 문학적 구도를 설정한 작가에게 축하를 드리고 싶다. 다만 세상에는 이런 예의바른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예의 바르게 슬픔을
앓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작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이른바 저항문학, 가장 협의의 참여문학이라는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그런 경우에는 이야기는 달라지며 겉보기 예의만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겠다. 돼지 잡는데 멱따는 소리가 안 나겠으며 육식은 즐겨하나 살생은 반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 위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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