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바수술 이야기]④ 60개의 심장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 송명근 건국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4개월간 미국 전역과 영국의 심장 센터를 돌아본 후, 1986년 나는 빈털터리가 되어 귀국했다.

미국에서 모은 돈을 모두 써버렸다는 나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다. 두 아이까지 딸린 내가 여행에 그 많은 돈을 썼다는 것에 아버지는 크게 실망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그게 왜 낭비가 아닌지, 그게 얼마나 귀중한 투자였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한심한 눈빛을 뒤로 하고, 나는 곧바로 부천 세종병원에 취직을 했다.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정도 기반을 확보해야 했다.

미국에서 배운 방법으로 여러 가지 선천성 기형을 국내 최초로 수술해냈다. 언론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나는 심장 수술에 관해 지명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때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심장 이식 수술이었다.

이미 미국에서는 심장 이식 수술이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심장 이식 수술은커녕 부분적인 이식 수술조차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우리나라 심장 수술의 발전을 위해 심장 이식 수술은 반드시 넘어서야 할 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뇌사에 대한 판정도 명확하지 않았고 심장 이식에 대한 거부감도 높았다. 그래서 나는 심장이식수술이 아니라 동종판막이식(사체의 판막을 떼어내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 방법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국내 최초로 했던 여러 가지 수술들에 대한 성과를 인정받아, 1987년 과학기술처로부터 7000만 원에 달하는 커다란 금액의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내가 그때 양과 개의 가슴을 열고 갈라낸 심장의 숫자만 60개가 넘는 것으로 기억한다. 사체에서 판막을 떼어내 영하 80도의 질소 탱크에 보관했다가 살아있는 동물에게 이식하기를 반복했다.

사체에서 판막을 떼어내기에 앞서, 나는 판막의 움직임을 규명하기 위해 판막엽과 판막을 지탱해주는 근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됐다. 판막은 책에서 배웠던 것처럼 단순히 압력차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문이 아니었다.

3차원 공간 안에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근부와 투명한 판막들이 실처럼 가는 근육들에 의해 이어져 마치 춤을 추듯이 조화를 이루며 움직였다. 그 모습에 나는 깊이 매료됐다. 그것은 대단히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이것이 나의 1980년대 말의 기억들이다. 빈털터리로 귀국했지만 마음은 부자였고, 한국에서의 생활은 삭막했지만 나는 행복했다. 사실 그때 내 눈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풍경은 실험실의 하얀 형광등과 냉랭한 공기, 늘 피투성이였던 수술대, 그리고 내가 갈랐던 수십 개의 심장들이다. 늘 어두운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했기 때문에 그때의 햇빛이 어땠는지도 모르고, 기억 속의 아이들의 모습은 곱게 잠들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나씩 깨달아 가는 심장의 신비로운 움직임은 나를 두근거리게 했고, 그것을 수식으로 하나씩 풀어나가는 순간들은 나를 벅차오르게 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붕 뜬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꿈에 한 발짝 가까워지고 있음을.

[인기기사]

·[포커스] 이영돈 PD, 그는 왜 MSG를 지목하는가? [2013/05/06] 
·검찰, 고대안암 등 대형병원 기부금 리베이트 속도전 [2013/05/06] 
·보훈병원 의사들 리베이트 적발, 특정약 홍보 강연하고 처방까지 [2013/05/06] 
·병원서 일회용 의료기기 재사용하면 '징역형' [2013/05/06] 
·법원 "병원 리베이트 자금은 돌려주지 않아도 돼" [2013/05/06] 

정심교 기자 simkyo@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위 기사는 중앙일보헬스미디어의 제휴기사로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중앙일보헬스미디어에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