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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보다 잘났다' 장밋빛 안경을 쓰고 인간은 태어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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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인간은 대개 ‘장밋빛 안경’을 쓰고 태어난다. 안경은 환상을 보여준다. 자신이 남보다 월등하다고 믿게 된다. 그것도 터무니없이. 심리학에서 얘기하는 ‘우월감 환상’이다. 직장인 80%가 자신을 평균 이상이라고 믿는 것도 그래서다. 스탠퍼드 대학의 톰 길로비치 교수는 이를 ‘워비곤 호수 효과’라고 불렀다. 워비곤 호수는 소설 속 가상의 마을이다. 이 마을 남자는 모두 강인하고 여자는 천하절색이며 아이들은 천재다.

 독일 심리학자 폴커 키즈와 마누엘 투쉬는 워비곤 호수 효과를 이용해 회사가 연봉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직원 모두 자신의 능력·실적·가치를 터무니없이 높게 평가한다. 그러니 누가 자기보다 많이 받는 꼴을 견디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연봉 공개는 자칫 전 직원을 불만 세력으로 만들 수 있다. 대부분 회사가 ‘절대 발설 금지’ ‘누설 시 엄청난 불이익’ 운운하며 연봉을 국가 최고 기밀쯤으로 여기게 만드는 이유다(『심리학 나 좀 구해줘』).

 이렇게 보면 고액 연봉에 대한 반감은 ‘원초적 본능’에 가깝다. 고액 연봉 논란은 1997년 미국에서 불붙었다. 주인공은 월트 디즈니의 전 CEO 마이클 오비츠. 그는 디즈니에서 14개월 재직했다. 디즈니의 전설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과의 갈등 끝에 해직됐다. 퇴직금으로 1억4000만 달러를 받았다. 정당한 사유 없이 해고될 때 받기로 한 돈이다. 한 달 월급이 100억원도 넘은 셈이다. 주주들이 발끈, 소송을 냈다. 엉터리 계약을 한 이사들을 법정에 세웠다. 8년 쟁론 끝에 2005년 법원은 계약 자유의 원칙을 들어 피고 손을 들어줬다.

 대신 재판장은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판결문에 “피고들의 행동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대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적었다. 이 소송이 빌미가 돼 2006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연봉 공개 규정을 만든다. 연봉 상위 5명의 보수 내역을 상세히, ‘평이한 문장’으로 공개하도록 했다. 복잡하고 교묘한 수사(修辭)로 스톡옵션이나 세금 대납 등 숨겨진 혜택을 제공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엊그제 국회에서 ‘연봉 공개법’이 통과됐다. 5억원 이상 받는 상장사 등기임원이 대상이다. 명분은 투명 경영이지만 속내는 월급쟁이들 ‘배 아픈 것’ 풀어주자는 취지다. 이 법이 하도급법과 함께 경제민주화 1, 2호 법안으로 꼽힌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효과는 의문이다. 대기업 오너 중엔 벌써 등기이사직을 내놓는 이들이 생겼다. 각종 편법과 옵션을 동원한 ‘스텔스(숨겨진) 연봉’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칫 공개 때만 요란 법석, 애꿎은 화풀이 연례 행사로 그칠 가능성도 크다. 배 아픈 것 풀어주긴커녕 실은 모두 안경쟁이였다는 사실만 깨닫게 한 채.

글=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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