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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비사「리지웨이」장군 회고록(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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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합참 중공침공건의>
무책임하고 무모한 「맥아더」의 북진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좌절되고 연합군이 다시 고통스런 철수를 시작할 때 나는 「지프」사고로 사망한 「워커」장군의 뒤를이어 미8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2월25일 동경에 도착한 나는 「맥아더」장군으로부터 현지 「브리핑」을 받았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중공의 남부지역이 무방비상태이기 때문에 장개석군대를 본사에 침공시키면 한국전에서 미군이 받고있는 군사적압력이 크게 완화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미 합참본부에 그와같은 건의서를 보냈다고 일러줬다.
이에 앞서 12월2일 그는 이미 병력증가와 제2전선의 설치를 위해 적극적이며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지지않으면 『승전의 가망은 없으며 점차적인 소모전은 패전의 가능성마저 가져올것』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합참에 보낸바 있었다. 이때 일부에서는 그가 중공침공 이외에는 빠져나올 수 없는 입장에 미국을 밀어넣기위해서 그와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비난했으나 나는 차라리 그가 승리의 간으성을 눈앞에두고 중공을 「종이 호랑이」로 믿으려는 그의 고집 때문에 그런이야기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함참에서는 중공침공안을 거부했다.

<핵공격을 했더라면>
미국의 방대한 공군력을 동원하여 만주와 본사에 산재한 중공의 군수시설을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중공을 굴복시킬수 있다는 「맥아더」의 주장은, 이러한 규모의 공격은 2년의 회복기간을 요하는 막대한 비행기 손실을 가져올것이라는 「반덴버그」장군의 주장앞에 논리적 근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중공이 한국과 일본에 있는 우리의 공군기지들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묵계의 덕분으로 한국전에서 제공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교착상태가 계속하면 중공본토에 핵공격을 가하여 중국을 「석기시대」로 퇴화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나는 그러한생각이 최악의 부도덕이라고 믿고 있다. 보복으로나 혹은 자국의 생존을 위해서 핵공격을 한다는것과 그보다 가벼운 이유로 그와같은 대량학살을 자행한다는 것은 전연 별개의 문제다.

<1·4 후퇴령의 고민>
비록 인간이 오랜 세월을 두고 발전해왔지만 아직은 유인원이 살던 「정글」에서 별로 멀리 오지는 못했으며, 그사이가 아무리 적은 거리일지라도 우리는 인간과 「정글」사이에 이루어진 거리를 지켜야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만약 「승리」를 인간의 존엄성 위에 올려놓고 『대가를 불문한 승리』를 외친다면 그런 행동에 대해서 신의 축복을 요청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서울을 철수하려는 결정은 51년1월3일에 내려졌다. 나는 「무초」대사로 하여금 이날 오후3시 이후에는 군용차량외에 어떤 차도 한강철교를 통과할수 없게되니 남은 한국정부의 차량은 그전에 모두 철수하도록 통고케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하대열에 나선 피난민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찰즈·파머」장군을 현장에 급파, 군차량의 순조로운 철수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피난민 발사」명령도>
나는 만약 민간피난민이 길을 비키지않을 경우에는 머리위로 공포를 쏘고 그래도 말을 듣지않으면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랜 고통을 참아온 피난민들은 반항을 하지 않았고 이들에게 총을 겨눌 이유는 없었다.
미군을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시킬 계획은 이때부터 동경과 「워싱턴」에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50년 12월말 합참회의는 「맥아더」에게 중공이 금력을 쏟는다면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낼만한 능력이 있다는 그들의 결론을 내렸다.
「맥아더」도 중공군의 새해 공세가 성공하는 것을 본후, 만약이 이상의 병력증강, 중공해안의 봉쇄, 만주기지 폭격, 장개석군의 본토침공등을 금하기로한 합참의 결정이 변경되지 않는다면 「유엔」군을 한국에서 철수하겠다고 동의해 왔다.

<유엔군 철수의 세조건>
나는 이와같은 의견에 반대했지만 한국인들에게줄 충격을 고려해서 이계획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경고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엔」군 철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던점을 명백히 밝혀뒀다.
그것은 첫째 소련군의 개입, 둘째 북괴군과 중공군이 동시에 총공세로 나오는 경우, 셋째 이모든 사태가 일기와 조화롭게 진행되는 경우
사실 1951년 봄 당시 소련군의 개입 가능성은 있었다. 합참에서 보내은 보고서에 의하면 「유럽」의 한 전토이기주재대사로부터 「몰로토프」를 위원장으로 한 소련극동위원회가 4월중에 소련군을 한국전에 대거참가시킬 계획을 세우고있다는 정보를 제공받았다는 것이고, 이 계획속에는 소련공군이 포함되어있으며 지상군은 주로 몽고출신 소련시민으로 구성하여 「의용군」의 명칭으로 투입될것이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대전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가운데 우리는 공산군의 남진을 서서히 막고 재북진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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