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견제구 통했나 … 슬쩍 물러선 아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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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왼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지난 21일부터 아시아를 순방 중인 뎀프시 의장은 한국과 중국에 이어 일본을 방문했다. [도쿄 로이터=뉴시스]

미국 정부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역사왜곡 발언과 각료들의 야스쿠니 참배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우려의 뜻을 전달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26일 보도했다. “동아시아 정세의 불안정을 초래한다”며 비공식적으로 우려를 표시했다고 한다. 패트릭 벤트렐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25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공식적인 항의를 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중국 등이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들 국가 간 강력하고 건설적인 관계가 평화와 안정을 증진시킬 것이란 점을 계속 촉구해 나갈 것”이라며 “일본 측과 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TV아사히는 “미국은 아베 정권 출범 때부터 역사문제로 한국·중국과 충돌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며 “경제나 안보문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제동을 걸어서인지 이날 중의원에 출석한 아베 총리는 꼬리를 살짝 내렸다.

 ▶아카미네 세이켄(赤嶺政賢) 공산당 의원=“(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 포함된) ‘침략’이란 단어의 정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발언이 파문을 낳고 있다. 한국·중국에서 보면 침략이고, 일본에서 보면 다르다는 뜻인가.”

 ▶아베 총리=“(무라야마 담화 중) 아시아 제국에 큰 손해와 고통을 줬다는 인식은 역대 내각과 같다. 역사 인식의 문제는 정치가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선 안 된다. 역사가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역사인식과 관련된 문제가 외교·정치 문제화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의 ‘침략의 정의’ 발언에 대해선 “역사가들 사이에도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 “역사는 확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며 전문가들이 파헤쳐 새로운 팩트를 찾아내는 경우가 있다” “내가 신처럼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는 식의 궤변으로 계속 정당성을 주장했다.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느냐’는 질문엔 “계승한다, 안 한다는 문제라기보다 아베 내각이 종전 70년을 맞아 미래지향적 담화를 발표하겠다는 것”이라고 피해 나갔다.

 일본 정부의 애매한 입장 때문에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기자들의 질문에 쩔쩔맸다.

 ▶기자=“무라야마 담화 중 ‘아시아 국가들에 손해를 끼쳤다’는 부분은 인정한다면 계승 못하는 부분은 어디인가.”

 ▶스가 장관=“(무라야마 담화 문제를) 정치·외교 문제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기자=“이미 외교 문제가 됐다.”

 ▶스가 장관=“계승하느냐, 안 하느냐만 따지는 건 이상하다…. (지금까지 말한 정도로) 그냥 정리합시다.”

 ▶기자=“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억측만 커진다. 외교문제가 돼 있다.”

 ▶스가 장관=“외교문제가 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자=“아니다. 지금 한국에서 항의가 나오고 있는데….”

 ▶스가 장관=“(손사래를 치며) 아니다. 그러니까…. 그만 그만.”

 일본 언론들의 비판도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마이니치(<6BCE>日)신문은 ‘총리의 역사인식을 의심한다’는 사설에서 “아베 총리가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설은 “침략에 대한 사죄는 무라야마 담화뿐 아니라 2005년 고이즈미 담화에도 포함돼 있고,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은 역사적 사실”이라며 “높은 지지율 때문에 이를 부인한다면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중·일 재무장관 회의 취소=다음 달 3일 인도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가 취소됐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26일 보도했다.

 신문은 “의장국인 중국이 일본에 개최 보류를 통보했다”며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양국의 대립, 각료들의 야스쿠니 참배가 배경인 듯하다”고 전했다. 이 회의엔 일본 측에서 야스쿠니 참배 파문의 장본인인 아소 다로(麻生太<90CE>) 부총리 겸 재무상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회의는 ‘동남아국가연합+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맞춰 잡혔고, 한·중·일 3개국의 새 정권 출범 이후 최고위급 회담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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