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새들은 좌우 날개로 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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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구속됐던 군사평론가 지만원씨가 며칠 전 풀려났다. 그는 지난해 8월 어느 일간지에 '이 나라는 사실상 김정일이 통치한다.

김정일을 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퍼준다. 5.18은 좌익과 북측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광고를 실었다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구속됐었다.

DJ정부의 대북정책은 김정일 살리기 위한 퍼주기라는 야유는 보수층간에는 널리 퍼져있었다. 야당도 비슷한 입장이었고 일부 보수언론도 같은 맥락에서 대북경협을 비판해 왔다.

그랬건만 '꼴보수'의 대표주자였던 池씨는 언론이나 야당의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조폭'처럼 생긴 검찰수사관들에 의해 목욕탕에서 옷도 추스르지 못하고 자동차에 태워져 30여차례 뺨을 얻어맞아가며 광주지검으로 압송됐다는 것이다(에머지 2월호 김갑기의 "지만원 박사 '역사에 관한 판단'재판을 방청하며"참조).

***중심세력들 다 어디로 갔나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보수세력.보수언론의 막가파식 비판이 자승자박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DJ정부의 대북정책이 4천억원 의혹처럼 분명 뭔가 있긴 한데 의혹의 실체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감정적 비판으로만 흘러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하나는 대선을 거친 후 그나마 존재하던 보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만원식 '꼴보수'목소리는 물론이고 건강한 보수의 목소리마저 잦아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정권 인수팀의 개혁 목소리에 그나마 보수의 소리를 내는 쪽은 전경련 한곳밖에 없어 보인다.

대체로 숨죽이고 있다. 대선 전 그렇게 소리치던 꼴보수들은 어디가고 세상이 이렇게 조용해졌나 싶을 만큼 세상이 달라져가고 있다.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보수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진보가 함께 건강한 목소리를 내면서 서로의 모자람을 서로가 채워줄 때 그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이다.

대북경협을 김정일을 살리기 위한 퍼주기가 아니라 우리 동포를 살리고 군사적 긴장완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다른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합리적.관용적 보수라야 사회의 중심세력이 될 수 있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나 자신 뭔가를 버리기보다는 지키는 쪽이고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 개선을 노리는 평균적 보수형에 속한다. 대북경협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좌파성향 지식인을 옹호한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상식적 보수에 속한다고 스스로 판단한다.

그러나 지난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심각한 반성을 한 적이 있다. 과연 이 사회를 주도한다는 보수 중심세력들이 제 역할을 다했는가. 특히 보수 주류언론에 속한다는 언론인으로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해 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자괴감(自愧感)이 들었다.

비록 그 죽음이 불가피한 과실치사였다 해도 사실적 보도를 적극적으로 했다면 결과가 이러했을까.

왜 미군은 작전로를 변경해 그 길로 돌아갔는지, 운전병과 통신병 간의 의사소통이 왜 안됐는지 등에 대한 초기 보도가 부실했기 때문에 사고의 불가피성은 인정되지 않은 채 억울한 죽음만 남게 된 것이 아닌가.

또 야당이든 언론이든 2억달러 대북 송금을 좀더 일찍 파헤쳤더라면 DJ대북정책의 허상을 보다 빨리 벗길 수 있지 않았을까.

뒤늦은 반성이 꼬리를 문다.주류언론이 제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중심 보수세력들이 제 할일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미동맹에까지 금이 가는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었던 게 아닌가.

주류 언론, 보수 중심세력, 또 최대 의석을 자랑하는 거대 야당이 제몫으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류 언론은 인터넷신문에 밀리고 거대 야당은 소수 여당에 패배하는, 보수의 몰락을 자초한 게 아닌가 하는 물음이었다.

*** 인터넷신문에 혼난 주류언론

우리 사회는 줄서기 사회다. 한번 보수가 밀리면 진보가 득세한다. 대세는 이미 진보가 머조리티고 보수가 마이너리티가 되는 쪽으로 급변하고 있다. 인터넷정치, 인터넷 장관 추천, 국민참여 수석이 청와대에 자리하는 민중정치로 탈바꿈되고 있다.

보수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금 보수세력들이 시름에 잠길 때가 아니다. 반성하고 자세를 바꿔야 한다. 막가파식 보수의 목소리가 아닌 열린 보수의 합리적 비판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야 한쪽으로 기울다 추락하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새들은 좌우 날개로 난다. 이젠 이 말을 진보 아닌 보수가 외칠 때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