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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벌, 괴질·한파에 멸종 위기…CNN "美 꿀벌 50% 증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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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토종벌이 사라진 봄. 토봉 농가는 생계 수단을 잃었다. 과수원 농부는 벌 대신 꽃가루 통을 들고 분주하다.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벌이 멸종하면 4년 내 인간이 멸종한다”고 했다. 양승원 공주토종벌연구회장이 겨울을 나며 텅 비어버린 벌통을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9일 공주시 반포면 마암리. 왕복 2차로 지방도가 지나는 마을 양편으로 연분홍색 진달래와 벚꽃, 노란 개나리가 갓 피어나기 시작했다. 토봉(土蜂) 경력 15년차, 공주토종벌연구회장 양승원(50)씨의 벌통에도 모처럼 활기가 돋는다. 오동나무의 속을 파내 만든 원통 모양의 벌통 아래 조그만 틈으로 짙은 갈색 토종벌들이 부지런히 들락날락한다. 벌통들을 놓아둔 밤나무밭엔 아직 새싹이 올라오지 않았지만 양씨의 토종벌 뒷다리엔 노란색 봄꽃 화분(花粉)이 제법 묻었다.

 잠시 뒤 벌통 중 한 곳을 뒤집어보는 양씨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 벌통 속에 토종벌은 온데간데 없다. 육각형 구조의 텅 빈 벌집만 남아 있다. 손을 갖다 대니 ‘바스락’ 소리와 함께 쉽사리 부서진다. 지난해 가을 75통에 달하던 양씨의 벌통은 겨울을 나면서 55통으로 줄었다. 그간 애지중지 키워온 토종벌의 27%가 이상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또 다른 벌통을 뒤집어 보니 벌통 바닥에 죽은 토종벌이 가득하다. 양씨는 “그나마 이 정도라도 벌통을 지킨 게 다행”이라며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맹추위까지 겹치면서 토종벌이 모두 죽어버린 농가가 한두 곳이 아니다”고 말했다.

 토종벌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 2010년은 시작일 뿐이었다. 당시 전국 토종벌 사육농가 1만7500호 중 76%가 ‘낭충봉아부패병’에 시달렸다. 병에 걸린 토종벌은 대부분 폐사했다. 문제는 그 후에도 ‘죽음의 행진’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06년 40만 군이 넘던 토종벌은 2010년 17만 군으로 급감했고, 이후 매년 절반씩 줄어들고 있다. 2011년엔 10만 군으로, 지난해는 4만5000군까지 떨어졌다.

 농림부는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토종벌이 3만 군 수준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군(群)은 벌의 규모를 세는 단위다. 1군은 여왕벌 한 마리와 일벌·수벌 1만~3만 마리로 구성된다. 겨울을 나면서 1군은 1만 마리 수준으로 줄어든다. 봄이 되면 다시 새끼를 쳐서 여름 즈음에 3만 마리 수준까지 늘어난다. 보통 벌통 하나를 1군으로 본다.

 최근 수년간 토종벌 멸종 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된 낭충봉아부패병은 꿀벌 유충에 생기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이다. ‘충 주머니병’ 또는 ‘토종벌 괴질’이라고도 불린다. 유충이 번식하는 봄에서 여름 사이에 주로 발생한다. 이 병에 걸린 유충은 번데기가 되지 못하고 말라죽게 된다.

 유독 한반도에 혹독하게 몰아치고 있는 이상기후도 토종벌의 적이다. 토종벌은 긴 세월 번식해오면서 한국 기후에 적응한 종이다. 하지만 최근처럼 겨울이 지나치게 춥고, 또 여름이 너무 더울 때는 생존이 힘들어진다. 올 1월 녹색성장위원회가 발간한 ‘2012년 이상기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겨울엔 북극의 찬 공기가 내려오면서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쳤고 여름엔 잦은 태풍과 폭우·폭염이 이어졌다.

 ‘문제의 원인을 알면 절반은 해결된 것’이란 말이 있지만 적어도 토종벌에겐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낭충봉아부패병은 1980년대 인도와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서도 광범위하게 발생했던 바이러스성 전염병이다. 하지만 아직 치료제도, 예방약도 개발되지 못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사실상 뾰족한 수가 없어 벌통 소독만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토종벌은 서양꿀벌과 달리 증식도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농림부는 2011년 6월 토종벌 농가와 관련 연구기관, 지방자치단체 등과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토종벌 종(種) 보전 육종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낭충봉아부패병이 재발한 데다 대부분 영세농인 토종벌 농가들마저 힘을 모으지 못하면서 흐지부지됐다.

 토종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곳은 당연히 토종꿀 생산농가들이다. 2011년 전국에서 사육되는 꿀벌 153만 군 중 약 6.5%인 10만 군이 토종벌이다. 토종벌이 한국 고유종은 아니다.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자생해온 벌의 종을 일컫는다. 그 때문에 ‘토종벌 개체수가 줄어들면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중국의 토종벌은 한국보다 더 심한 각종 바이러스 질병을 앓고 있어 수입이 금지돼 있다. 일본의 토종벌은 값이 한국의 세 배 이상이라 수입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토종벌이 사라지면 과수농가도 직접적인 피해를 본다. 특히 배·사과 과수원에 치명적이다. 양봉농가에서 키우는 서양꿀벌은 토종벌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서양꿀벌은 한국의 배·사과꽃을 싫어해 옆에 둬도 꽃가루받이가 되지 않는다. 세종시 농업기술센터 이은구 팀장은 “우리나라 기후와 자연에 잘 적응해온 토종벌 수가 급격히 줄면서 인공수정이 아니면 과수농사를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배·사과꽃이 필 무렵인 4월 하순이 돼도 과수원에서 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대신 농부가 직접 ‘러브터치(Love-touch)’라는 인공수정 장치를 어깨에 메고 꽃가루액을 뿌려야 한다. 세종시 연수면 월하리에서 배 과수원을 하는 홍순국씨는 “20일께면 배꽃이 필 텐데 꿀벌이 오리라고는 기대도 않는다”며 “기술센터에서 빌려주는 인공수정 장비로 수분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종류와 원인은 다르지만 외국에서도 꿀벌이 집단으로 사라지거나 죽는 현상이 잇따르고 있다. 2006년 미국에서는 꿀벌이 갑자기 없어지는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이듬해까지 22개 주에서 꿀벌의 25~40%가 감소했다. 피해는 심각했다. 꽃가루받이를 해줄 벌이 사라지면서 아몬드·사과·블루베리 등 과수 농가도 큰 피해를 보았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지난 겨울 꿀벌의 집단폐사율은 미국 역사상 가장 높았다. 이달 초 CNN은 "지난 겨울을 나면서 미국 내 꿀벌의 절반 이상이 갑자기 죽어버릴 정도로 증상이 더욱 심각해졌다”며 꿀벌의 위기를 집중 보도했 다. 유럽과 남미 등에서도 미국 사례와 유사한 ‘봉군붕괴 증상’이 확산됐다. 미국 국립연구소와 대학들은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벌통의 잦은 이동과 밀집 사육, 기생충과 바이러스 감염, 농약 중독과 이로 인한 면역 결핍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 100대 주요 작물 중 71개가 야생 벌류와 꿀벌의 꽃가루받이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주요 16개 과수·채소작물에서 꿀벌이 생산에 기여하는 가치가 6조원에 달한다.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은 “농사를 짓다 보면 토종벌도, 나비도 사라져버렸다는 걸 실감한다”며 “인류는 물론 지구의 생명이 매우 위태롭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세종=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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