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못벌어도 공연 좋으면 보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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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당동 용문빌딩 2층.'무대의상 유니센스'란 자그마한 간판이 걸린 35평 남짓한 작업실엔 재봉틀과 옷감들로 빼곡했다. 오페라 의상 제작 14년째를 맞는 허영회(61)씨의 작업실이다. 이곳은 허씨가 다섯명의 직원과 함께 밤샘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 무대 의상의 산실이다.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마침 국립오페라단이 오는 4월 24~2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리는 푸치니의 오페라'투란도트'의 의상 작업이 한창이었다. 의상 디자인을 맡은 리비아도 달 포조(45)가 직접 와서 병사 의상에 붙일 금속 장식을 붙이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편의 오페라를 맡아봤지만 '투란도트'처럼 충분한 시간 여유를 주고 작업을 해본 적이 없어요. 아직 캐스팅이 끝나지 않아 가수 체형에 따른 치수 조정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 공연 개막 한 달 전에 디자인을 들고 오는 경우도 많아요."

허씨는 앙드레 김 의상실 출신이다. 1977년 아역 탤런트로 활동하던 둘째딸 허유정(31)씨가 출연한 아동극 '알리바바'의 의상을 맡은 게 인연이 돼 공연 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연극 의상을 주로 해오다가 1990년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시작으로 국립오페라단.김자경오페라단이 제작한 굵직굵직한 오페라의 의상을 맡아왔다.

92년 국내 초연된 도니체티의'라 파보리타'를 비롯, 93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개관 기념무대에 오른'마농 레스코''카르멘''예프게니 오네긴'과 '리골레토'(1997년)'코지 판 투테'(2001년)'전쟁과 평화'(2002년)의 의상을 맡았다.

국립오페라단의'일 트로바토레'(1991년)로 인연을 맺은 프랑스 출신 연출가 산 바르톨로메오는 국내 오페라단과 계약할 때는 아예 "의상 제작은 유니센스"라고 명기할 정도다.

연극'브리타니쿠스''간계와 사랑''햄릿''마르고 닳도록''앙드로마크', 뮤지컬'여로'등의 의상도 유니센스의 작품이다. 98년에 종로3가에서 신당동으로 작업실을 옮긴 것도 국립극장과 가까워서다.

"국내에선 극장이 자체 제작하는 작품이 많지 않아 외부 용역을 주고 있지만, 외국처럼 오페라극장 내에 큰 규모의 의상 제작실을 갖춰야 합니다."

동대문시장.광장시장을 샅샅이 뒤져 옷감과 액세서리를 찾아내는 것은 공동대표인 강영수(46)씨의 몫이다. 공연 때 백스테이지에서 직접 떨어진 단추를 달고 수선까지도 한다. 등산이 취미인 허씨는 치악산 등반에서 국어교사 출신인 강씨를 처음 만나 동업자의 길을 걸었다.

"영세한 대학로 극단에서 의상 제작비를 못 받은 적도 많아요. 하지만 좋은 공연을 올릴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서울에서'세빌랴의 이발사'공연을 본 일본 니키카이(二期會)오페라단에서 '라 트라비아타'의상을 주문해온 적도 있어요."

허씨는 외국에서 4개월 걸려 만드는 옷을 2~3일 만에 제작하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무대의상의 성패는 돈과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lully@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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