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코노미스트] '16강 신화'의 反시장성

중앙일보

입력

요즘 우리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보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이고 언론이고 한때 측은하리만치 매도를 하더니만 이번엔 너무 했다 싶었던 모양이다. 격려를 한다는 것이 지나쳐 기대가 되고 바야흐로 기대가 믿음으로 바뀌고 있다.

월드컵 16강 진출은 희망일 뿐 현실은 미국에 지고, 쿠바와 비기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한 채 짝사랑하다 급기야 부당한 비난을 퍼붓는 나쁜 버릇을 이제 버릴 때도 된 것 같다.

온 나라가 성원하는 월드컵 행사를 앞두고 무슨 찬물 끼얹는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몇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첫째, 월드컵 경기 주최와 16강 진출은 별개의 사안이다. 둘째, 지하철 객차 내 방송까지 동원, 월드컵 개최의 성공을 다짐해도 파급 효과엔 한계가 있다. 냉정하게 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시아대회·동계올림픽 또는 부산영화제의 경제효과와 다를 게 없다.

국책연구원에서 ‘월드컵대회의 경제적 파급효과 극대화 방안’ 이란 보고서를 만들 정도로 난리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기업별로 장사가 되겠다 싶은 것이 있으면 그렇게 머리를 쓰면 될 것이다.

‘축구를 중심으로 참가국들이 국력을 경쟁하는 각축장’으로 평가한 것은 요즘 말로 오버다. 왜냐하면 이런 논리는 예외 없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거쳐 ‘범정부 차원의 지원정책’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셋째, 아무리 월드컵 16강 진출이 국민적 관심사인 양 떠들어도 막상 경기를 치를 그 시각에 배구나 농구 또는 연속극에 TV채널을 맞춰놓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혹 우리 대표팀 경기는 보고 싶지 않은 축구 팬은 없을까. 생업에 매달려 아예 TV도 볼 수 없는 사람은 또 어떤가.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일만 있으면 모든 국민이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일지는 몰라도 다분히 반(反)시장적이다. 왜냐하면 시장은 개인이나 기업 등 개별 경제주체의 독자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전제할 때 비로소 작동하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제 ‘국가적’ 또는 ‘국민적’이라는 표현 하에 그야말로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는 무모함은 삼가야 한다. 외환위기 때 나온 ‘금 모으기 운동’도 한 세기에 한 번 정도면 됐지 자주 반복할 성질의 사건은 아니다.

가령 대북정책은 관련 행정부서나 국회가 충분히 논의해서 정하고 그 과정에서 공청회나 기타 수단을 통해 일반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면 된다. 명동 거리를 지나는 사람을 다짜고짜 붙잡고 “어느 쪽이냐?”는 식으로 몰아붙여 획일화하려는 노력은 배격돼 마땅하다.

더욱이 대세-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개인(기업)의 통상적인 경제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수단을 소유한 정치집단-에 동조하지 않을 경우 혹 있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은 분명 절름발이 시장에나 있을 법한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나돌아 다니는 정보가 아무리 많다 한들 획일적인 판단을 강요하는 시장은 좋은 시장이 아니다. 그래서 의견교환을 거친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영어의 타협을 의미하는 ‘compromise’는 ‘같이(com) 약속한다(promise)’는 뜻이다. 서로 한 발씩 다가와 가운데서 만나는 것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기업이익 예측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대개 업종 동향을 체크하고 재무제표를 분석한 후 기업탐방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올해 이익은 얼마가 되겠다고 공표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동일 기업을 보는 10명의 애널리스트가 내놓는 10개의 예측치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시장은 이런 다양한 예측치를 근거로 ‘컨센서스(consensus)’라고 하는 절충점을 만들어낸다.

이 비즈니스의 백미(白眉)는 내년 초 기업실적이 발표되는 순간 가장 비슷하게 맞힌 애널리스트는 단 한 사람밖에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양성 속에 합의를 끌어내고 합의 중에도 다양성이 경쟁하는 곳이 좋은 시장이다.

출처:이코노미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