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글리벡 줄다리기'의 결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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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며칠 전부터 백혈병 환자들의 농성이 계속되고 있는 서울시청 옆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11층 강당의 분위기는 무겁기만 하다.

'병에 죽고 돈에 죽고 행정에 죽고' '우리도 살고 싶다, 살인적 글리벡 약가 인하하라…'.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그 가족,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봉사자들의 표정이나 곳곳에 붙은 벽보 문구에도 절박감이 묻어 있다.

'기적의 신약'으로 불리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보건복지부는 지난 21일 이 약의 보험약가를 100㎎ 1정에 2만3천45원으로 결정해 2월 1일부터 적용키로 했다.

이로써 1년 이상 끌어온 줄다리기에서 글리벡을 생산하는 세계적 다국적 제약사 노바티스사의 요구는 거의 관철됐지만, 환자 입장에선 생명을 담보로 한 과다한 약값 부담의 공포에 직면하게 됐다. 농성은 이래서 시작됐다.

희귀 난치병인 만성 골수성 백혈병은 급성과 달리 성인에게 주로 발병한다.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평균수명이 4년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는 초기 만성기 3백명을 포함해 6백명 정도로 추산되나 환자의 30% 정도만 골수 이식이 가능하고 이 경우도 사망률이 높은 편이다.

종전에 받아온 인터페론 치료에 비해 글리벡 투약은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효과가 탁월해 환자들에겐 그야말로 생명의 복음이다.

글리벡이 국내 시판 허가를 받은 2001년 6월 이후 보험약가 결정 과정은 환자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에까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신약, 다국적 제약사 개발, 한달 3백만원 가까운 약값 등 이와 관련된 논란은 '의약품의 공공성'이 시험대에 올랐음을 보여줬다.

그해 11월 복지부가 1정당 보험약가를 1만7천8백원으로 첫 고시하자 노바티스사 측이 2만5천원에서 물러설 수 없다며 약가 재조정 신청을 내면서 지루한 줄다리기는 시작됐다.

환자와 시민단체들은 "기업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이라며 환자가 부담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값이 정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바티스 측은 한국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낮은 가격을 적용할 수 없다며 선진 7개국의 평균 시판가격 기준을 고수했다. 노바티스 측은 그동안 필요한 환자에 글리벡을 무료로 공급해왔다.

이번에 결정된 보험약가는 주요 선진국 평균 약가의 83% 수준이라고 한다. 복지부는 세계에서 가장 싼 가격이라고 주장하지만 환자들은 "다국적 제약사에 굴복했다"고 성토한다.

실제로 평생 하루 4~10정씩 글리벡을 복용해야 하는 환자 입장에선 경제적 부담이 엄청나다. 아직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초기 만성기 환자는 한달 2백75만원, 보험이 적용되는 경우도 증상 진행 정도에 따라 한달 49만원에서 1백24만원까지 부담해야 한다.

환자들은 현실적으로 생업에 종사하기 어려운 만큼 여간 부유하지 않고서는 이 같은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 농성에 나선 사람들이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 가족 전체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수긍이 간다.

이 시점에서 정부나 노바티스 측을 비난해봐야 뾰족한 대책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약자의 복지를 배려하는 사회안전망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희귀 난치성 질환자에 대해 정부와 민간이 체계적으로 지원사업을 펼치는 선진국의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또 초기만성기 환자 등에 대한 글리벡의 건보 적용 확대도 적극 추진할 일이다.

사회적 약자와 서민층 복지를 유달리 강조하는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약은 있는데 돈이 없어 죽어간다'는 농성이 서울 한복판에서 계속돼서야 모양새가 좋지 않다.

한천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