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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 곽재용 감독 '클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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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소설 '소나기'의 소녀가 죽지 않았다면 소년과 소녀는 그 후 어떤 사랑을 꽃피웠을까. 애틋하긴 하지만 왠지 이뤄지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한데-. 곽재용 감독의 신작 영화 '클래식'은 이러한 궁금증을 품었음직한 수많은 독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답장이다.

'소나기'는 곽재용 감독이 사춘기 시절 강한 인상을 받았던 소설. 언젠가 한번쯤 꼭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던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는 2001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엽기적인 그녀'에서 엽기녀 전지현의 상상력을 빌려 '소나기'를 패러디했었다.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를 업어줬던 그 소년을 같이 묻어 달라구…. 그것두 산 채루…. "

감독은 2년 전 엽기적으로 비틀었던 '소나기'를 한껏 감성적인 사랑 이야기로 발전시켰다. 마치 '멜로영화의 정석(定石)'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풀밭.다리.강물.별.반딧불이 등 낭만적 요소가 총출동된 이 영화는 우연인 것 같던 인연의 실타래가, 풀고 보니 필연에서 비롯됐다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예찬이다.

영화는 과거의 사랑과 현재의 사랑을 번갈아 비춘다. 대학 선후배로 만난 지혜(손예진)와 상민(조인성)이 맺어지는 현재와, 지혜의 엄마 주희(손예진)와 준하(조승우)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과거다. 어느 날 지혜가 여행을 떠난 엄마의 낡은 편지함을 열어보면서 영화는 과거로 줄달음친다.

아무래도 영화 속 비중도 그렇고 과거의 사랑 쪽이 눈길을 붙드는 편이다. 둘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하지만 이들의 시간이 애절함으로만 채워지지 않는 게 대중영화로서 이 작품이 갖는 강점이다.

채변 검사.구충제 복용이나 트위스트 춤, 조회를 서다 픽 쓰러지는 학생 등 1960~70년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코믹하고 유쾌한 풍경들이 영화의 잔잔한 흐름에 급물살을 일으키며 등장 인물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조금 분위기가 다운될 만하면 다시 '업'시키는 감독의 재량도 녹록지 않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조승우와 손예진의 안정된 연기로 지탱된다고 해야겠다.

1인2역을 한 손예진은 지난해 '연애소설'의 다소 경직된 연기에서 순간 순간 풍부한 표정을 보여주는 연기로 업그레이드됐다는 인상이다. 특히 포크 댄스 교습 때 보여주는 '엽기춤'은 압권이다.

다만 분장이 미흡한 탓인지 어려보이는 외모 탓인지 "나 많이 늙었어"라는 진지한 대사에서 실소를 자아내는 게 옥의 티다.

조승우 역시 닭살스럽고 '클래식'한 대사를 특유의 눈웃음과 맑은 표정으로 부드럽게 소화해낸다. 이들은 '엽기적인 그녀'가 탄생시킨 스타 전지현.차태현 못지 않게 보기 좋은 한쌍이다.

이 영화가 상업영화로서 관객의 호흡을 쥐락 펴락하는 건 사실이지만 거슬리는 점도 눈에 띈다.

보는 이의 눈물샘을 완벽하게 자극하겠다는 욕심일테지만 필연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영화의 결말에 짜증을 낼 관객들도 상당할 듯 하다. 준하가 참전한 베트남전 장면 등 군더더기를 더해 상영 시간(2시간6분)을 늘린 것도 그렇다. 30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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