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古宅)과 함께 숨쉬어 온 우리의 명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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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진정한 의미의 ‘상류 문화’나 ‘상류층’이 없다고 한다. 갑자기 땅부자가 되어 하루 아침에 팔자 고친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졸부’라는 말이 더 익숙할 뿐이다. 이렇게 된 데는 조선시대 상류층을 형성했던 양반의 급격한 몰락, 식민통치와 전쟁, 급격한 산업화 등의 역사적·사회적 요인이 있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흔히 이상적인 상류층을 언급할 때, 영화에서 봤을 법한 영국을 비롯한 구미의 귀족층을 떠올린다. 그리고 명문가가 되는 기준도 대체로 서양의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말 우리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명문가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명문가를 논한다는 생각 자체가 은연중 봉건적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무슨 기준으로 ‘명문가’와 ‘졸부’를 구분할 수 있을까. 원광대학교 조용헌 교수가 쓴『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는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전국의 명문가 15곳을 직접 발로 찾아 다니며 쓴 이 책은, 명문가가 되기 위한 조건을 실제 가문의 역사를 통해 밝히고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위한 정신적, 물질적 근거를 드러내 보인다.

그렇다면 조용헌 교수가 생각하는 명문가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일정한 경제력을 갖추어야 한다. 품위 있는 삶을 지향하며 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집의 선조나 집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How to live)’가 중요하다.

돈이 많다고, 벼슬이 높다고 명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진선미(眞善美)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온 집안이어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명문가의 조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된다는 단순한 도덕
적 의무를 승화시킨,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상생의 원리를 체득해야 한다. 이것은 특권 계층의 솔선 수범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조건은 고택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집을 유지하는 것과 명문가가 되는 게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하지만 거센 서구화와 산업화의 비바람 속에서도 고택들을 유지한다는 자체가 일정한 경제적 토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며, 나아가 그만한 역사적 의식이 없다면 더욱 불가능할 것이라는 저자의 설명에 수긍이 간다. 세 번째의 조건은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해야 한다.

도덕성과 역사적 흔적이 묻어나는 고택, 그리고 훌륭한 인물. 여기에 저자는 한 가지를 더한다. 그것은 바람과 물의 원리다. 전국의 명문 고택을 두루 현장 답사한 저자는 한국의 명문 고택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역사의 신산(辛酸)에서 우러난 인문학적 지층이 쌓여 있지 않으면 사람을 들뜨게 한다. 들뜨면 십중팔구 향락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향락을 목표로 한 집은 바로 졸부의 집이다. 그래서 집에도 역사와 인문학적 지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전통의 무게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자연의 향기가 결여되어 있으면 박물관에 사는 것과 같은 부담을 느낄 수 있다.(p.77)”

하지만 저자는 어떤 집이 명문가인가 하는 추상적 질문에만 빠져들지 않는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그것은 저자가 이 책에 나오는 열 다섯 가문의 집과 사람과 풍광을 직접 보고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의 원칙을 370년간 지켜온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고,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며, 만석 이상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고,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며,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400년 전통의 가훈을 지키며 살아온 경주 최 부잣집. 풍수적 기운이 짱짱한 화강암 지반의 서울 종로구 일대, 특히 서울의 대표적인 명당 터인 안국동 지역에서 한국정치의 꿈을 키워낸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 민간으로서는 가장 많은 8천500책(2만 권 분량)의 문중문고를 가진 남평 문씨 집안.

이 밖에도 이 책은 단순히 부와 권력이 아니라 지조와 전통, 덕과 예술과 학문 등에서 명문의 색깔과 향기를 품어내는 우리의 명문가들을 깔끔한 흑백사진과 함께 담아내고 있다.

한편으로 이 책은 21세기를 앞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명문가는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권력남용과 부패로 얼룩진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꿈꾸는 것은 허황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조가 앞서는 것은, 이 책에 비쳐진 명문 고택이 너무도 찬연한 까닭은 아닌지….(박정철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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