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 떼일라' 국민들, 현금인출기 몰려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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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시민들이 18일 수도 니코시아에서 ‘키프로스에서 손 떼’라는 문구 등이 적힌 피켓을 내걸고 정부의 예금 징발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U 정상들은 16일 키프로스에 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약속하는 대신 일정액의 예금 징발을 요구했다. [니코시아 로이터=뉴시스]

지중해 키프로스는 비극의 섬나라였다. 1960~70년대 그리스계와 터키계 주민이 서로 총을 겨누며 핏빛 내전을 치렀다. 이후 40여 년간 평화가 깃들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될 조짐이다. 키프로스발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3차 위기 가능성이다.

 불똥이 한국까지 튀었다. 18일 코스피 지수는 0.92% 떨어진 1968.1로 거래를 마쳤다. 일본과 홍콩 주가도 2% 넘게 추락했다.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값은 1114원까지 급락했다. 엔화 가치는 달러당 94엔 선으로 올랐다. 엔저 흐름에 급제동이 걸린 것이다.

 발단은 16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의 결정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EU 리더들은 재정·금융 위기에 직면한 키프로스에 구제금융 100억 유로(약 14조5000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문제는 묘한 조건 하나에 있었다. 예금 10만 유로(약 1억4000만원) 이상에 9.9%를, 그 미만에 대해선 6.75%를 정부가 떼내 시중은행 구제에 쓰라고 키프로스에 강요한 것이다. ‘예금 강제 징발’ 조치다.

 메르켈 등은 “키프로스 정부가 EU의 도움을 받아 부실 은행을 구제하게 됐으니 그 혜택을 보는 예금자들도 일부 고통을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그 배후엔 잇따른 남유럽 구제에 반발하는 독일인들을 달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메르켈은 동유럽·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는 전초기지인 키프로스를 도울 수밖에 없다. 키프로스는 남유럽 위기의 방아쇠가 될 우려도 크다. 하지만 9월 총선을 앞둔 메르켈은 유권자들의 반발이 두려웠다. 그는 키프로스가 애초 요청한 구제금융 170억 유로 중 100억 유로만을 줬다. 또 재정긴축 외에 예금 징발이란 전례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메르켈의 결정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키프로스에서 예금인출 사태(뱅크런)가 일어났다. 수도인 니코시아 곳곳에 설치된 현금인출기(ATM) 앞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시장은 뱅크런이 이탈리아 등 유럽 대륙으로 번지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 좋은 소식인 구제금융 결정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 셈이다. 경제역사 전문가들이 말한 ‘앤드루 잭슨의 역설’이다. 미국 7대 대통령인 잭슨은 1830년대 국가부채를 몽땅 갚는 쾌거를 거뒀다. 하지만 전무후무한 이 업적이 엉뚱하게도 1837년 금융위기의 방아쇠가 됐다.

 화들짝 놀란 EU 리더들이 진화에 나섰다. 키프로스 정부는 17일 의회 표결로 예금 징발을 법제화하려고 했으나 국민과 야당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표결을 미뤘다.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키프로스에 요구한 조건을 다른 나라엔 적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벨기에 브뤼셀 EU 본부에선 소액 예금자를 예외로 하는 수정안 검토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태는 확산될 조짐이다.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키프로스 예금 징발이 유럽 시중은행들의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내 예금도 떼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다른 유럽 국가들로 퍼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키프로스와 인접한 그리스를 비롯해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유럽 시중은행에서 뱅크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우려는 18일(현지시간) 유럽 국채시장을 강타했다.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의 국채 값이 급락했다. 정치 위기 와중인 이탈리아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4.5%에서 4.8% 선으로 뛰었다.

 메르켈 등이 간과한 것은 무엇일까. 블룸버그통신은 영국 런던 금융시장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키프로스가 90년대 이후 동유럽의 금융 허브로 바뀐 사실을 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실제 키프로스 시중은행 전체 예금 700억 유로 중 500억 유로가 외국인 돈이다. 특히 러시아계 자금이 200억 유로에 이른다. 작은 나라 키프로스의 뱅크런이 주변국으로 빠르게 전염될 수도 있는 이유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핌코의 수석 매니저인 빌 그로스는 “키프로스 예금 징발 때문에 유로존 위기를 가까스로 막고 있던 브레이크가 풀려버렸다”고 말했다. 키프로스 사태가 2010년과 2011년에 이은 3차 유로존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앤드루 잭슨 역설

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 재임기간(1829~1837) 동안 이룬 연방정부 부채 청산이 뜻밖에도 금융위기의 방아쇠가 된 사건. 잭슨은 월가의 간섭이 싫어 국가부채를 모두 갚아버렸다. 은행들은 투자할 국채가 사라지자 대안으로 농지대출에 열을 올려 부동산 거품을 일으켰다. 이 거품의 붕괴로 1837년 위기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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