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얼어붙은 금강산은 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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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지성 장 보들리야르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를 "지금까지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들을 집약해 놓은 절대적인 사건, 즉 모(母)사건"으로 보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모든 역사와 권력의 게임 규칙이 뒤집어졌고 분석의 전제들도 뒤흔들렸다고 보들리야르는 보고 있습니다.

*** 남북화해·협력의 母사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분단 50년 만에 소떼를 몰고 고향인 북한 땅으로 들어가던 스펙터클은 분단의 규칙을 단숨에 뒤집은 '모사건'이었습니다. 그 뒤 1998년 11월 금강산 뱃길이 열렸고 2000년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껴안으며 남북을 서로 오가자 하던 감격의 장면들이 엊그제 일 같이 선연합니다.

그러나 그제 연두기자회견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한국 방문 여부를 확실히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갖고 답방을 촉구하던 이전과는 분명 다른 태도입니다. 그리고 금강산 뱃길도 이제 닫힐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관광객이 줄어 매달 20억~30억원의 적자를 감당할 여력이 이제 이 사업의 주체인 현대아산 측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가 그 적자를 보전해주는 방법을 찾지 않거나 북한이 육로를 열거나 관광 특구로 지정해 관광을 활성화할수 있는 길을 터주지 않는 한 금강산 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여론은 금강산에 냉담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다며 북한에 대한 지원을 '퍼주기'로 보는 여론도 팽배합니다.

그리고 한나라당 등 야당에서는 "민간사업은 민간에 맡기고 정부는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는 정경분리 약속을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남북 화해와 협력의 모사건인 금강산 길이 가차없이 막혀버릴 것도 같습니다. 한순간의 허황된 꿈과 그 실패로 말입니다.

서구의 지성들이 다각도로 뉴욕 테러를 분석, 인문학적 성찰로 미증유의 현실을 해석하고 나아갈 방향을 내놓고 있듯 우리의 지성들도 금강산 문제에 대한 폭넓고 심층적인 의견들을 내놓았으면 합니다.

지난해 8.15 평양축전 방북 대표단에 포함된 문인들을, 평양으로 떠나기 몇시간 전에 한 상가(喪家)에서 만났습니다.

민주화에 앞장섰던 그 진보적 문인들은 마치 밀파되는 특사와 같이 방북에 대한 은밀한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통일원의 방북 승인은 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평양에 갔다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급진적 인사들의 평양에서의 행태가 문제되면서 남북협력문제를 놓고 남남 갈등이 불거지게 됐습니다. 여기에 뉴욕 테러로 북.미관계가 극히 날카로워지면서 남북관계 또한 얼어붙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금강산 길이 막혀가고 있는 것까지 수수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뉴욕 테러 이후 "정치나 국가를 경제로 대체하자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은 빠른 속도로 설득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국가의 인색함과 탈규제화.자유화.사유화가 테러를 불렀다며 국가.정치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관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 정치가 당당히 관여해야

정경분리 원칙에 충실하면 금강산 뱃길이 막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금 우리 정치권은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군사 독재, 사회적 부패와 갈등 등을 해소하고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70, 80년대의 분단 모순 논의도 잠잠해진 채 다시 분단 모순만 팽배합니다. 남북 화해와 통일 문제를 경제적 논리에만 맡길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국민적 공감대에 따라 국가와 정치가 정당하게 관여해야만 합니다. 그런 국민적 공감대는 지성인의 속 깊은 성찰로 이끌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얼어붙은 금강산은 묻고 있습니다. 지성인들의 성찰의 따뜻한 목소리를.

이경철 문화부장 bacch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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