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하청업체, 갑의 횡포에 언제까지 시달려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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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기업과 하청업체는 흔히 갑(甲)과 을(乙)의 관계로 불린다. 발주를 받을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하청업체의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민주화의 목표 중 하나가 갑·을 관계에 따른 폐해를 줄이자는 것이다.

 그제 경찰청이 발표한 하청 비리 수사 결과는 대기업의 횡포가 어느 정도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금호석유화학은 하청업체들을 상대로 115억원 상당의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09년 건자재사업부를 신설한 상황에서 매출 규모를 부풀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또 이 회사의 지모 전 상무 등은 “공사 수주에 필요하다”며 업체들로 하여금 5억5000만원 상당의 리베이트를 대납하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차장 한 사람은 “건설현장 책임자가 회식하자고 한다”며 3000만원을 받아 개인 용도로 쓰기도 했다. 하청업체들은 이러한 부당한 요구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문제는 그 결과 하청업체가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는 데 있다. 한 업체는 허위 세금계산서가 채무로 잡히면서 부도가 났고 업체 대표의 집이 가압류됐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금호석유화학의 대응은 “우리도 사실상 피해자”라는 데 그치고 있다. “당시 경영권 공백 과정에서 해당 임원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이다. 허위 세금계산서 부분에 대해선 “매출 실적을 높이기 위해 다음 해 발생할 매출을 앞당기는 ‘선매출 거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임직원들의 일탈과 비리를 막지 못한 책임은 대체 누가 져야 한다는 말인가. 이번 비리가 근본적으로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불평등한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에서 보다 성의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위해 새로운 제도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존 제도와 법률로 불법·탈법적인 관행을 걷어내는 작업이 우선돼야 한다. 대기업도 시대의 요청에 발맞춰 공정 거래 질서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중소기업이 억울하게 눈물을 흘리는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