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오디세이] 빙상 쇼트트랙 국가대표 이승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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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운동하잖아."

국내 학교체육에 특기자 제도가 도입된 1970년대 이후 학창시절 운동선수였다면 이런 말 한번쯤은 듣고 지났을 것이다. 별 의미 없이 들릴지 모르는 이 말에는 그 사람이 운동선수라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에는 '(운동을 하는 대신)공부를 안한다'란 뜻이 숨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을 듣는 운동선수들은 어깨를 '움찔'하며 기분나빠한다. 상황에 따라 '저 친구는 무식하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들은 왜 그같은 선입관에 시달려야 하나. 왜□ 운동을 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안하니까. 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학교의 이름을 가슴에 달고 운동만 해야 하니까. 수업을 듣고 싶어도 교실에는 들여보내주질 않으니까. 그게 국내 학교체육의 현실이니까.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 태릉선수촌. 자랑스런 국가대표들이 모여 있는 곳. 그러나 운동을 잘 했기 때문에 오히려 학교수업은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아쉬운 청춘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태극마크'들이 무식하다고□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었어요. 운동선수는 공부 못한다는 말. 그래서 무식하다는 말. 요즘 많이 달라졌다지만 아직 그런 인식들이 남아 있는 게 사실이잖아요. 미국에서는 학생운동선수라면 더 뛰어나고, 더 똑똑하다고 인정받는다던데…. 걔들은 공부하면서 운동하니까요. 우리나라는 다른 건 다 미국을 따라가면서 왜 그건 안따라가는지 모르겠어요."

앳된 얼굴의 그는 당돌하다고 느낄만큼 또박또박 국내 학교체육의 문제를 지적해냈다.

그리고 소신있게 자신의 청춘을 쏟아부은 스케이트와 노트북컴퓨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국가대표,그리고 서울대

빙상 쇼트트랙 국가대표 이승재(20)는 지난해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국가대표선수로서 처음으로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이 상징적인 사건(□) 하나로 국내 학교체육에 신선한 메시지를 던졌다.

"유치원 때 아버지 손에 끌려가 스케이트를 배웠죠. 얼음을 지치고 나가는 순간 양볼에 느껴지는 스피드의 짜릿함과 상대를 제치고 나가는 재미가 마냥 좋았어요."

대구 성동초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남들보다 잘 타는 스케이트. 요령에서 앞섰고 승부 근성도 있었다. 처음 출전했던 동계체전(태릉)에서 전국 3위에 입상했다. 그때부터 '선수'가 됐다.

"그때는 학교수업을 다 했어요. 중학교(오성중)에 올라가서도 수업 끝나고 나서 운동했어요. 문제는 전국대회에 참가할 때였죠. 일주일 정도 대회에 갔다오면 수업에 들어가도 이해하기가 힘들었어요. 특히 수학은 따라가려야 따라갈 수 가 없었어요. 시험 보면 10점, 20점 맞기 일쑤였죠."

진짜 고비는 고교 입학 뒤였다. 1998년 고교에 진학하자마자 그는 국가대표가 됐다. 입학식을 한 지 두달 정도 지난 5월이었다. 그는 가방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와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그때부터 그는 돈을 벌지만 않을 뿐 학업 대신 운동만 하는 직업선수가 됐다. 학교□ 물론 못갔다.

"3년 동안 수업 받은 날은 손꼽을 정도예요. 공부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운동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운동 끝나면 언제나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다른 또래들이 공부하는 것을 생각하면 '지기 싫다'는 생각에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는 남들, 아니 다른 운동선수처럼 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학생과 똑같이 시험을 치러 대학에 도전했다. 주말이면 외박 허가를 받아 대구로 내려갔다. 금요일.토요일 이틀 동안은 수학과외를 하루에 네시간씩 했다. 그의 부모는 신문 사설과 문제지를 매주 태릉으로 보내주었고 쇼트트랙 국가대표 전명규 감독은 영어강사를 초빙해 어학능력을 키워주기도 했다.

2000년 수능은 쉬웠다. 그가 얻은 점수는 2백93점. 4백점 만점자가 60명이 넘는 상황에서 평균 73점 정도의 2백93점은 대단치 않았지만 학교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그에게는 '작은 기적'으로 불릴 만했다. 서울대는 예.체능계 상위 25% 안에 들고 학교장 추천을 받은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딱 한번 가본 대학교

대학 진학과 함께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그는 곧바로 휴학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학생 운동선수로서의 또 하나의 도전을 위해서였다. 바로 올림픽 금메달. 이제는 운동선수로서 가장 높은 곳에 도전해볼 차례였다.

"고등학교와 달라서 대학은 학점관리도 까다롭고 '진짜'공부를 하는 곳이잖아요. 이왕 공부하는 거, 남보다 열심히, 잘하고 싶었어요. 또 운동 욕심도 컸어요. 학교를 다니면 운동에 전념하지 못할 수밖에 없거든요. 휴학하고 나중에 확실히 공부하자는 결심을 굳혔죠."

지난해 2월 폴란드 자코파네에서 벌어진 겨울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그는 1천5백m.3천m는 물론 5천m계주까지 휩쓸며 3관왕에 올랐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은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결과는 좋았지만 유니버시아드대회 출전 때문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지 못했어요. 학교에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결국 한국에 돌아와서 5월께 딱 한번 갔어요. 처음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너무 낯선 분위기… 뭐라고 해야 되나. 내가 속한 곳이 아니고 그냥 한번 구경온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도 그는 복학하면 누구보다 공부를 잘 할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는 "죽을 고비(운동이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다 넘겼는데 가만히 앉아서 하는 공부를 왜 못하겠습니까"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 말은 운동선수라면 무식하다는 통념을 지닌, 그리고 학교수업은 시켜주지도 않는 '세상'을 향해 내미는 힘찬 도전장이었다.

#코앞에 다가온 또 하나의 도전

그는 요즘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빌 틈도 없이 5시30분 스케이트장에 나가 준비운동을 하고 6시면 어김없이 얼음판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훈련량이 늘었다. 오는 2월 9일로 다가온 겨울올림픽(미국 솔트레이크시티)을 위한 마지막 점검이다.

"신문에서 읽은 적 있어요. 외국의 예를 들면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나중에 의사도 되고, 교수도 됐다고. 그래서 그들이 운동만 하는 '반쪽 인생'을 살지 않는다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던 덕분이죠. 얼마나 듣기 좋아요□"

그는 현재 세계 쇼트트랙 월드컵 랭킹 2위다. 1위는 98년 나가노올림픽 금메달에 빛나는 국내간판 김동성(고려대). 그는 아직 실력에서 김동성에게 뒤진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그는 자신이 4번주자로 출전하는 계주에서 김동성, 민룡(계명대)등과 힘을 합쳐 금메달을 노린다.

"팀워크가 좋아서 해볼 만하죠. 그러나 한국 쇼트트랙은 당연히 금메달이다라는 시각은 부담이 돼요. 정말 순간적으로 승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한 순간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끝이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긴장이 돼요."

한국시간 2월 24일에 벌어질 올림픽 5천m계주 결승은 말 그대로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운동의 전부가 걸린 '인생의 승부'다.

#내 청춘의 보람과 의미

그는 자신의 청춘이 보람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진지하게 마음껏 했고,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주위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앞으로 도전할 새로운 길까지 마련해 놨으니 얼마나 얻은 게 많으냐는 것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선생님들도 모르고, 학교친구들을 사귀지 못한 게 아쉬워요. 우리가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았더라면 학교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여자친구들한테도 인기가 높았을 텐데…."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국가대표 학생운동선수의 한계. 그는 특기자제도 위주의 국내 학교체육과 대표선수를 무조건 태릉선수촌에 몰아넣는 엘리트스포츠정책에 강한 반항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가수 서태지 얘기를 꺼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학업을 포기했던 'X'의 상징. 스케이트를 그렇게 잘 타고 싶었으면 왜 학업을 포기하고 운동에 전념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그는 서태지가 자신의 우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서태지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긴 했지만 정상적인 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태지는 음악에서는 최고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잖아요. 물론 제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딸 수도 있고, 공부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요. 그래도 둘다 열심히 했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어요. 제가 운동을 하면서 공부도 한다고 했을 때,'나도 해야지'라며 함께 공부를 하려는 동료들보다 그나마 하던 공부도 손을 들어버리는 동료들이 많았어요. 운동이 너무 힘드니까요."

인터뷰 내내 그의 조그만 얼굴을 보면서 달팽이가 생각났다. 느린 걸음이지만 혼자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고 있는 누군가의 노래 속에 나왔던 그런 달팽이가. 그는 분명 어두운 국내 학교체육의 미래에 희망을 주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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