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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이 뭐길래] 1. 개발과 투기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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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과 정부가 돈을 내고,서울시 공무원이 하수인으로 토지를 매점했다. 서울시장은 땅값이 빨리 올라가도록 깃발을 흔들고, 시민들이 호응해 땅값 올리기에 동참했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강남개발을 이렇게 평가했다.

강남지역은 개발 초기부터 땅 투기와 땅값 상승의 발상지였다. 정부는 잇따라 투기억제대책을 내놓으면서 한편으론 굵직한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그 결과 '투기→개발→투기'의 과정이 반복되며 땅값이 치솟았다.

강남은 1963년 1월 1일 서울시 편입 이전에는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했다. 채소를 심는 한적한 농촌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배추와 무를 실은 나룻배가 오갔다. 69년 제3한강교가 완공되며 시작된 강남개발은 90년대 서초동 법원단지 이전과 테헤란로의 벤처열풍, 도곡동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건설로 완결단계다.

◇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본격 개발=강남의 공식개발은 66년 1월 서울시가 '강남개발 구상'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이는 66년초 착공한 제3한강교 공사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67년 11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확정되면서 제3한강교 공사가 빨라지고 강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특히 고속도로 부지를 싼 값에 확보하기 위해 계획한 영동1.2지구 구획정리사업(1지구는 현 서초구,2지구는 강남구)이 개발에 속도를 붙였다.

◇ 개발계획 나올 때마다 투기바람=60년대 중반만 해도 강남 일대 땅값은 평당 2백원 선으로 당시 파고다담배 다섯갑 수준이었다. 그런데 69년 다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말죽거리(현 양재동)일대는 평당 4천~5천원으로 올랐다.

'강남 땅을 사자'는 바람은 70년 11월 '영동지구 개발계획'이 발표되면서다.양택식 서울시장이 직접 나서 영동지구 8백37만평에 인구 60만명을 수용하는 새 시가지를 개발한다고 발표했다. 상공부 청사와 산하 12개 국영기업체를 삼성동 일대에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상공부 이전계획은 무산됐지만 이 발표는 강남개발에 불을 댕겼다.

◇ 강북 명문고의 강남 이전=정부는 안보문제를 이유로 강북지역의 인구집중 억제와 강남지역으로의 분산정책을 폈다. 강북 도심 고교의 강남이전도 꾀했다. 76년 경기고의 이전을 시작으로 휘문.서울고와 숙명여고 등이 옮겼다.

78년 서울이 9개 학군으로 나뉘면서 이른바 강남 8학군 신화가 탄생했다. 90년대 고교 내신성적의 반영폭이 커지며 한 때 8학군 열기가 주춤했는데,지난해 수능시험이 어려워지자 학원이 많은 강남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 갈수록 강화된 투기억제 처방=67년 부동산 양도차액의 50%를 과세하는 법을 만들었다. 74년 5월에는 기업의 비업무용 토지 매점을 금지하면서 공한지에 대해 세금을 무겁게 매기는 규정을 마련했다.

78년에는 토지거래에 대한 신고제와 허가제를 도입했다. 아파트값이 치솟은 89.90년에는 신도시건설과 함께 토지공개념을 도입, 토지초과이득세와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과세를 강화했다. 그 여파로 강남에 남아 있던 빈 땅에 건물 신축붐이 일면서 강남개발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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