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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찾아 삼만리… 이름도 생소한 꽃반시, 너 얼마 만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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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경북 상주 ‘원농원’의 선원규 대표(왼쪽)가 곶감 건조장에서 이제왕 현대백화점 건식품담당 바이어에게 옛 방식대로 곶감을 말리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원농원은 올해 처음으로 꽃반시·먹시 등 ‘옛날 곶감’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해 눈길을 끌었다. 옛날 곶감은 곶감으로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드는 데다 재래종 감이 일본 종자와 섞여 사라지면서 시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사진 현대백화점]

‘먹거리 온고지신(溫故知新)’ 바람이 분다. 토종 곶감·닭·돼지·조 등 재래종의 화려한 귀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달 1일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 지하1층 설 선물세트 특설판매장. 60대 여성 고객이 ‘꽃반시 세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게 얼마 만이야.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먹던 곶감이 어떻게… 이거 지금 몇 개나 살 수 있어요?” 현장에 있던 꽃반시 세트 30개가 한꺼번에 팔렸다. 36개들이 한 세트에 13만원 하는 제품이다. 이 고객은 3일 추가로 들어온 20개도 마저 가져갔다. 올해 처음 상품화된 꽃반시 세트 150개가 그렇게 동이 났다. 또 다른 ‘옛날 곶감’인 ‘토종 둥시 곶감세트’(32개들이 12만원) 200개도 이날 다 팔렸다. 이 백화점 곶감 세트 34종 중 완판된 것은 5종뿐이다.

‘옛날 곶감’을 상품화한 ‘원농원’ 선원규(46) 대표를 만나기 위해 경북 상주를 찾았다. 전국 곶감의 70%가 생산되는 곳이다. “아이고, 내년에 꽃반시를 또 만든다고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오네요. 꽃반시는 순 물덩어리예요. 어른남자 주먹만 한 감을 깎아도 말리고 나면 달걀만 해지거든요. 물기가 많으니 일반 곶감보다 20일은 더 말려야 되는 데다 무거우니까 꼭지가 쑥쑥 빠져서 막 땅에 떨어져요. 익기도 전에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것도 많으니….” 선 대표는 “꽃반시 7000개를 말렸는데 곶감 된 건 5000개뿐”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가 한 해 동안 생산하는 곶감이 모두 100만 개가량으로 꽃반시는 이 중 0.5%에 불과하다.

꽃반시는 포도주처럼 검붉은 빛깔에 흰색 분이 꽃처럼 피어나 마블링이 잘된 한우를 연상시키는 둥글납작한 곶감이다. ‘모양도 예쁘고 쫀득쫀득 단맛도 좋지만 만들기가 너무 힘들어 식구들끼리나 먹던 곶감’이었다. 감 농원마다 한두 그루밖에 남지 않은 옛날 종자라 곶감 원료를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선 대표도 “꽃반시 나무가 자란다는 농원 주인을 찾아가 술 대접 해가며 겨우겨우 모았다”고 했다.

감 표면에 굵은 붓으로 먹물을 찍어놓은 듯한 검은 무늬가 있는 토종 둥시(먹시)는 일본 종자와 접붙이는 과정에서 사라져 지금은 일반 둥시 100개당 한 개꼴로 섞여 거래되고 있다. 선 대표는 1%밖에 안 되는 먹시를 하나하나 골라 따로 말려 상품화했다. 간단한 살균도 하지 않고 옛 방식 그대로 자연 건조했다. 사흘만 비가 내려도 온통 곰팡이가 슬어 다 버려야 하는 위험 부담을 안은 덕분에 개운한 뒷맛이 남는 ‘옛날 곶감’이 됐다.

 사라져가던 재래종 농산물이 새롭게 상품화되고 있다. 종자 주권을 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더 나은 맛과 품질을 옛것에서 새롭게 구하려는 시도가 더해진 결과다. ‘어렸을 적 그 맛’을 찾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잊혀진 100여 년 전 토종 작물을 다시 살려내기도 한다. 2011년부터 제주도에서 재배 중인 메조 ‘삼다메’, 차조 ‘삼다찰’은 일제가 조직적으로 수집해간 우리 조 유전자를 2008년 돌려받아 상품화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조 재배 면적은 1000㏊에 불과하지만 일제 때만 해도 54만㏊로 벼 재배 면적의 40%였다.

 삼다메는 뿌리가 넓고 깊게 발달해 잘 쓰러지지 않아 기계화 재배에 특히 유리하다. 다른 품종 조에 비해 칼슘 함량도 약 55% 높다. 삼다찰은 생산량이 많고 잘 쓰러지지 않아 기계 수확도 가능하다. 올해 약 50㏊에 두 품종이 보급될 예정이다. 국립식량과학원 오인석 잡곡과장은 “삼다메와 삼다찰은 기존 조 종자보다 영양이 풍부하고 강한 토종”이라며 “제주뿐 아니라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까지 보급을 확산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래종 복원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닭이다. 닭과 돼지 같은 축산 자원은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종자 훼손을 심하게 당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해외 종자를 들여와 가축 개량을 명목으로 토종과 교잡하면서 잡종이 양산됐다. 토종닭도 일제 강점기 때 뉴햄프셔종 등 외국 개량종 닭이 대량 도입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국립축산과학원 최희철 가금과장은 “1992년부터 전국에 흩어져 있던 토종닭 종자를 수집해 15년 만인 2006년에야 DNA 판별까지 가능한 토종닭 5품종 12계통을 복원했다”고 설명했다.

 토종닭 종자를 바탕으로 2008년 육질이 쫄깃하고 풍미가 좋은 ‘우리맛닭1호’가 나왔고 지난해 5월에는 빨리 자라는 삼계탕 전용 ‘우리맛닭2호’와 알을 많이 낳는 유정란 생산용 ‘우리맛닭3호’가 특허 등록됐다. 우리맛닭은 2008년 1만150마리에서 2011년 4만2900마리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2000여 년 전 고구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토종 돼지도 일제 때 사라졌다. 체구는 작지만 튼튼하고 번식력이 강한 흑색 토종 돼지는 일제가 버크셔종을 들여와 교잡하면서 잡종으로 변했다. 농촌진흥청은 20년 동안 25억원을 들여서 토종 돼지를 복원했다. 1988년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현 국립축산과학원)에서 돼지 9마리를 가지고 재래 돼지 복원을 시작해 250마리의 돼지를 길러내며 연구한 끝에 2008년 토종 돼지를 복원한 ‘축진참돈’이 나왔다. 재래종 돼지고기는 입맛을 당기는 붉은색에 육질이 쫄깃쫄깃하다. 글루타민산, 아스파르트산 등 맛 성분이 많이 들어있고 지방 함량도 많아 상품성이 높은 고기다.

 재래종을 되살려 상품화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는 98년부터 제주도 단지무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한겨울에도 잎이 싱싱하게 자라 옛날에는 겨울철 국거리와 나물거리로 쓰이며 제주도 사람들의 비타민 공급을 도맡았었다. 그러나 외래 종자와 마구 섞여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10㎏까지 자랄 정도로 크고 아삭아삭해 복원에 성공하면 대형 식당이나 물김치 재료 등 활용 범위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 김천환 담당 연구사는 “재래종 복원은 시간과 품이 많이 들지만 새 품종 개발만큼 의미 있는 사업”이라며 “단지무는 둥그런 모양도 독특해 일본의 ‘사쿠라지마다이콩’처럼 관광상품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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