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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디레버리지 2막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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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안 좋다.” 자본시장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며 나름 성공했다는 지인의 말이다. 그는 동물적 투자감각으로 지난 10여 년 사이 몇십억원을 수천억원으로 불렸다는 고객이 “앞으로 2~3년 사이 위기가 닥칠 것 같다”며 포트폴리오를 갈아엎는 걸 목도했다고 했다. 그 고객의 예감이 이번에도 적중할지, 그건 지나봐야 알겠지만 곳곳에 켜지는 빨간불이 투자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사업비 31조원 규모의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이라던 서울 용산역세권 개발사업.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벼랑끝에 서 있다. 겉으로는 자금조달 방안과 사업개발 방식을 둘러싼 대주주 간 이견이 그 원인이라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결국 확 바뀐 금융환경이 환부의 핵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부동산 시장은 꽁꽁 얼어버렸다. 사업성이 나빠진 프로젝트에 금융회사들이 호락호락 돈을 댈 리가 없다. 때맞춰 강화된 건전성 규제는 금융회사들이 대규모 개발사업에 장기간 돈을 빌려주는 것을 더욱 꺼리게 만들었다. 용산 개발 사업의 시행사 이름인 ‘드림허브’처럼 꿈만 꾸다 막을 내릴 위험에 처한 배경이다. 용산뿐인가. 공정률 50~60%에 멈춰선 아파트 사업장, 철거작업만 끝내놓은 공터가 전국 곳곳에 즐비하다. 일부 건설사는 수년 전 1차 워크아웃도 모자라 2차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뒤바뀐 돈의 흐름, 디레버리지(deleverage·부채감축) 시대가 만들어낸 풍경들이다. 어려움은 건설업체만의 몫이 아니다. 은행권의 얇아진 예대마진, 수출과 내수 시장의 침체 등 단편 속보들을 모아놓고 보면 전체적으로 이상징후라고 할 만하다. 가계부채, 저성장, 고령화, 여기에 악화된 남북관계까지 사방이 지뢰밭·사막·첩첩산중·전쟁터다.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 때에는 디레버리지가 폭발적인 양태로 일어났다. 대규모 공적 자금 투입에 힘입어 빚더미를 강제로 털어냈다. 지금은 분할 폭발 과정이다. 환자를 놓고 즉각적인 수술보다는 약도 쓰고 체력도 보강해 가며 치료해야 하는 과정이다. 각국 정부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중앙은행은 돈을 푸는 대차대조표 확대 정책을 펴왔다. 신흥국도 성장세를 이어가며 충격을 어느 정도 흡수해줬다. 하지만 그 사이 심각한 불균형이 발생했다. 민간의 충격을 덜어준다며 정부 부문에선 레버리지를 오히려 확대했다. 그 여파로 남유럽을 강타한 재정위기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유럽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

기업과 금융회사 등 민간부문의 디레버리지는 이제 시작 단계다. 세계경제의 감속으로 언제까지 수술을 유예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부채 수준을 낮추는 디레버리지 과정은 신흥국에서 자본 엑소더스를 부추길 우려가 있다. 다만 지금은 기상관측이 헛갈리는 상황이다. 상류인 미국·유럽·일본이 디레버리지의 충격파를 줄이기 위해 냉각수(양적완화)를 뿌려대고 있는 탓이다. 당장 하류인 신흥국에서는 가뭄 걱정보다 홍수 걱정이 앞선다. 문제는 이 흐름이 어느 순간 반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급정지(sudden stop)’다. 외국 자본 유입이 갑자기 멈춘 뒤 대규모 감소세로 돌아서는 현상이다. 신흥국이라면 외국 자본의 과도한 유입, 어느 순간의 과도한 유출 모두 경계하고 대비해야 하는 이유다. 국내적으로는 디레버리지에 매진할 때다. 정공법으로 빚을 털어내야 다음에 올 위기를 수월하게 넘을 수 있다.

허귀식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산업부장 ksl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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