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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과 뇌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세상이 어지러운 탓일까? 선물과 뇌물의 한계마저도 모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의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불어로 「포·드·뱅」이라고하면 술병이란 뜻인데, 이제 그 뜻은 뇌물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다정한 사람들끼리 술한병 주고받는다는 것이 어찌 허물이랄 수 있겠는가. 도리어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아니 될 아름다운 풍습의 하나일 것이다. 선물을 한다는 것은 곧 정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서로의 체온을 느끼게 하는 마음의 교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에선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선물이란 것이 사라지고 만 것 같다. 「한 병의 술」이라 하더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이해관계가 숨어있고 정의보다는 음흉한 타산이 도사리고있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이젠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서로 서먹한 기분속에서 눈치를 떠보는 신경전을 벌인다. 순수한 선물이라 하더라도 먼지많은 이 세상에선 뇌물로 오해될 수가 일쑤다. 가난한 살림이라 하더라도 추석이면 그래도 서민들의 주름살이 펴진다. 농경민들의 가을은 풍성하고 여유가 있다. 그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서는 추석이면 청명하고 둥근 인정의 달이 뜬다. 한햇동안에 신세를 진 사람, 그리운 사람, 그리고 서로 도움을 준 이웃들끼리 풋대추 몇 알씩이라도 나누어먹는 풍습이 있었다. 추석선물에는 풋곡식 같이 향기로운 냄새가 있었다. 햇감처럼 붉은 단심이 젖어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엔 추석선물마저도 뇌물로 타락하고 만 것 같다. 특히 도시가 그럴 것이다.
거리의 상점마다 특수한 포장으로 싼 추석선물이 전시되어있다. 얼마안있으면 선물상자나 술병을 든 사람들이 분주한 거리를 누비게 될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그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다. 인정이 메마른 세상인데도 선물을 나누는 그 광경이 도리어 추악하게 보이는 것이다. 『저 자는 또 누구에게 아첨하려고 사과상자를 들고 가는가?』그러한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추석민폐의 상납」을 없애라는 내무부의 지시만 보더라도, 지금껏 그 선물상자란게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선물이 뇌물로 타락해버린 살벌한 세상이 새삼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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