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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총리 사퇴후 당선인과 둘이 울면서…"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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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김용준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장(75)은 23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끝까지 총리 후보직 사퇴를 말렸지만 스스로 사퇴를 단행했다”며 “박 당선인은 주변에 믿을 사람이 많지 않은 외로운 사람이나, 요즘 주변에 인재가 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48일간의 인수위원장직 업무를 마친 김 전 위원장이 이날 중앙SUNDAY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밝힌 소회다. 그러면서 “박 당선인은 능력과 전문성에 앞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따져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청와대와 장관 인사에 특정 대학 출신이 많은 현상은 그런 과정에서 우연히 나온 결과며 앞으로 국세청장을 비롯한 차관급 인사에선 탕평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내 ‘인간 승리’의 귀감으로 불려온 김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11일 박근혜 후보 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을 시작으로 지난해 12월 27일엔 대통령직인수위원장, 지난달 24일엔 총리 후보에 연달아 발탁됐다.

하지만 두 아들의 병역 면제와 재산 증식 논란 등으로 닷새 만에 후보직을 사퇴한 뒤 인수위원장 업무에 전념해 왔다. 김 위원장은 “처음 총리직 제의를 받았을 때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사실을 알리며 고사했지만 박 당선인의 뜻이 굳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며 “하지만 총리는 애초부터 할 뜻이 없었기에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에 앞서 김 전 위원장이 이끌어 온 대통령직 인수위는 박근혜 정부의 5대 국정목표와 21대 국정전략, 140대 국정과제를 제시하고 지난 22일 해단식을 했다. 인수위는 ^정부 조직개편 ^내각과 청와대 인선 ^국정과제 설정 등의 성과를 거뒀다. 청와대 참모진 6명과 부처 장관 7명에 인수위 출신이 등용돼 ‘박근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수위가 ‘정권 인수 종료’를 선언함에 따라 박 당선인은 25일 0시부터 대통령의 모든 법적 권한을 공식 이양받고 직무수행에 들어간다.

-선대위와 인수위원장을 하며 지켜본 박 당선인은 어떤 사람인가.
“아주 상식적인 분이다. ‘이건 이렇다’고 설명하면 ‘아, 그렇죠!’ 하고 금방 이해한다. 그리고 예의가 정말 바르다. 하루에 서너 번 넘게 통화하는데 그때마다 ‘위원장님이세요? 저 박근혭니다’ 하고 인사한다. ‘당선인인데요’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예를 갖추기가 쉽지 않다. 또 외로운 사람이다. 나는 박 당선인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다. 시상식 같은 데서 두 번 만난 게 전부다. 그런 나를 신뢰해 선대위원장과 인수위원장에 임명하고 총리로까지 쓰려 했다. 이런 걸 보면 주변에 믿을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분이 외롭다고 보는 이유다. 하지만 요즘은 주변에 인재가 많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박근혜 정부가 잘돼야 한다. 그래야 국민도, 나라도 잘 살지…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이분이 워낙 열심히 일해 밤에는 집에서 스트레스라도 풀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는 거다.”

-당선인의 고위직 인사가 성균관대 출신에 편중됐다든지, 탕평 의지가 안 보인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선인이 능력이나 전문성 위주로 인사를 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를 더 따지는 것 같다. 당선인에게 무슨 ‘인사 비선(秘線)’이 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인사는 그분이 하시고, 가끔 법조인 인사에 대해선 내게 물어보았다. 첫째로 겸손하냐, 둘째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를 물어보더라. ‘성균관대에 몰렸다’는 비판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따지면서 인사하다 보니 우연히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하지만 국세청장 등 청장이나 차관 인사 땐 탕평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수위원장을 마친 심정과 앞으로의 계획은.
“한마디로 ‘야! 시원하다’다. 원래 일해 온 법무법인으로 돌아가서 계속 일할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해단식 이후 다시 야인으로 돌아온 첫날, 김용준 전 인수위원장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익숙한 천직으로 돌아간 사람의 얼굴이었다. 23일 중앙SUNDAY와 인터뷰하기 직전 김 전 위원장은 자신의 서류 바인더에 써놓은 문구를 보여줬다.
“칼에 베인 상처는 일주일이면 아물지만 말에 베인 상처는 평생 간다.”
김 위원장은 “이 글귀는 1월 6일 인수위원장에 취임할 때 나와 인수위원들의 좌우명으로 삼기 위해 써둔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 문구의 의미가 뭔가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 관계자로서 전임 인수위나 정부를 비판하지 말고,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갈 것인가만 생각하자는 취지로 쓴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전임 정권을 헐뜯어 이미지에 득을 보려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니다 싶어 이렇게 다짐하고, 다른 인수위원들도 마음에 새기도록 한 것이다. 이 문구를 두고 마치 내가 언론의 의혹 제기에 유감을 품고 쓴 것인양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김 전 위원장의 총리직 사퇴에서 가장 먼저 불거진 게 두 아들의 병역 면제 논란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를 미리 알았나.
“지난달 중순 박 당선인이 ‘총리를 맡아 달라’고 전화를 해왔다. 나는 ‘적법하게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 두 아들이 모두 병역면제입니다. 청문회에서 이런 사실이 거론되는 자체가 누가 될 수 있습니다’라며 고사했다. 박 당선인은 바로 ‘문제없습니다’라고 하더라. ‘이회창 전 총리는 두 아들의 병역 면제로 인해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배했는데 괜찮겠습니까’라며 재차 고사했다. 하지만 당선인은 ‘이 전 총리와 위원장님은 경우가 다릅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더라. 더는 고사할 수 없어 수락한 거다.”

“말에 베이면 평생” 문구는 인수위 다짐

-그 뒤로 언론에서 의혹 제기가 잇따랐는데 당선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전혀 동요하지 않더라. 내가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하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며 도리어 격려해 줬다. 내가 귀가 좋지 않아 박 당선인과 통화하다가 큰 소리로 되묻는 바람에 이혜진 동아대 교수가 법질서·사회안전분과 인수위원 후보에 오른 사실이 중앙일보에 보도된 날이었다. 아침에 신문을 보고 놀라 당선인에게 ‘신문 보셨느냐’고 전화했더니 ‘신문에 뭐가 났나요?’ 되묻더라. 전말을 보고했더니 ‘우리가 무슨 못할 말을 했습니까? 괜찮습니다’라고 하더라. 몇 시간 뒤에 이혜진 교수가 그대로 인수위원으로 발표됐다. 인수위 사람들이 ‘역시 박근혜 당선인이다’라며 탄복했다.”

-귀가 좋지 않아 ‘보청기 쓰는 총리 후보자’로 화제를 많이 낳았다.
“박 당선인이 지난해 대선 직후 전화를 걸어 ‘인수위를 맡아 주십시오’라고 제의했는데 나는 잘 안 들려서 ‘네? 운수업요? 저는 운수업은 하나도 모르는데요’라고 되물어 당선인이 한참 웃은 일이 있다. 나는 휴대전화는 아예 없고, 급한 통화는 집사람이나 운전기사 겸 비서 것을 쓴다. 그러다 보니 당선인이 불편하셨을 것이다. 인수위원장이 된 지 얼마 안 돼 당선인께서 ‘휴대전화 하나 장만하시고 보청기도 비싸고 좋은 걸로 바꾸시라’고 말씀하더라. 바로 다음날 내 명의로 휴대전화를 마련하고 보청기도 고급형을 산 뒤 당선인에게 보고했지.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TV에서 자꾸만 내 보청기를 부각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어느 신문 칼럼에선 ‘보청기 총리는 안 된다’는 식으로 비판한 것도 서운했다.”

-총리 후보 지명 후 닷새 만에 사퇴했는데 결심은 언제 했나.
“하룻밤 자고 나면 근거 없는 의혹 제기가 잇따라 나는 물론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그런 가운데 후보 지명 나흘 만인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처음으로 당정 회의를 했다. 새누리당 의원들하고만 한 시간가량 했는데 나오면서 ‘여당하고만 해도 이 정도로 힘든데 총리가 돼서 야당까지 상대하면 정말 하기 힘들 것 같다’는 회의가 들었다. 다음 날(지난달 29일) 아침에도 신문에 의혹 제기가 이어지는 걸 보고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이날 박 당선인이 인수위 사무실에 출근했다. 내가 독대를 청해 ‘총리직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당선인이 ‘절대 무너지면 안 됩니다’라고 강하게 막더라.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까 ‘하루만 더 참아 달라’ 하시기에 일단 그러겠다고 하고 나왔다. 그런데 가족들이 난리였다. 아내는 ‘오늘 물러나지 않으면 집에 들어오지 못할 줄 알라.’고까지 했다. 결국 당선인에게 ‘돌발상황이 생겨 하루를 참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연락했다. 당선인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에게 ‘사퇴한다고 발표하라’고 지시해 버렸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발표가 안 나오더라. 내가 윤 대변인에게 ‘자꾸 늦어지면 내가 직접 기자실에서 발표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니까 저녁 7시쯤인가 TV 화면에 ‘김 총리 후보자 사퇴’ 자막이 뜨더라. 그걸 보고 인수위 청사에서 퇴근했지.”

-박 당선인 허락 없이 총리직을 사퇴해 버린 셈인데.
“박 당선인과 그날 밤에 통화했다. 박 당선인이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악성 루머까지 나왔지만 버텼는데 여기서 무너지시면 어떡하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총리직은 그만뒀지만 앞으로 늘 당선인을 돕겠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서 써 주십시오’ 하니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더라. 그러겠다고 했다. 나랑 당선인 둘이서 울먹이면서 ‘함께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자’고 약속했다.”

-그후에도 인수위원장직은 계속했다.
“당선인에게 ‘인수위원장을 계속할지 여부는 당선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했더니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계속 하셔야죠’라고 하더라. 나도 끝까지 일한 게 잘했다고 생각한다.”

-총리 사퇴 이틀 뒤에 언론의 의혹 제기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A4 용지 12장짜리 e메일을 기자들에 보내 화제를 모았다.
“당선인이 ‘사퇴하더라도 인민재판식으로 근거 없는 의혹을 몰아붙이는 데 대해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이틀 연속 강조하더라. 그래서 윤창중 대변인과 상의해 다음날 e메일 형식으로 기자들에게 보낸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근거 없는 보도로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내는 건 (언론이) 하지 말아야 한다.”

“로펌 고문 때 보수 정말 작았다”

-언론의 의혹 제기에 억울한 입장인가.
“내 재산은 1994년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됐을 때 밝힌 내용 그대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홍제동 재개발 아파트인데 13년 동안 도배 한 번, 수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전기나 가스요금도 제일 적게 내는 집이었고, 아내는 얼마 전까지도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렇게 살면서 한 푼 두 푼 모아 땅을 산 게 가격이 오른 것뿐인데 그걸 문제 삼아서….”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의 성적을 스스로 매겨본다면
“학교에서 ‘시험 잘 봤다’고 떠든 친구는 점수가 낮고, ‘못 본 것 같다’는 친구는 점수가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않나. 스스로 점수를 매기기보다 역사와 국민에 맡겨야지. 하지만 잘한 게 없지는 않다. 인수위원장직을 수락한 직후에 전임 인수위에서 수백 명에 달했던 자문위원을 폐지하겠다고 당선인에게 건의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 일부 인수위원들이 자문위원을 존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인수위에서 스캔들이 난 게 없지 않나. 또 간사위원 회의를 많이 열고 ‘예산은 얼마든지 지원해 줄 테니 현장방문을 자주 하라’고 독려한 것도 평가하고 싶다. 솔직히 인수위원들이 고생 많이 했다. 지난 48일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고, 밤 10시 전에 퇴근한 사람이 없었다.”

-인수위원 가운데 평가할 만한 인사가 있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나.
“다들 뛰어나고 열심히 일한 분들이다. 굳이 얘기하자면 유민봉 국정기획분과 간사가 능력이 뛰어나 중용될 것으로 봤는데 결국 청와대 수석(국정기획수석 내정자)이 되더라. 이혜진 법질서·사회안전분과 인수위원은 부산 모 법대 교수가 ‘안철수 교수 다섯 명이 나와도 못 당할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란 평가를 하더라.”

-세간의 ‘불통 인수위’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언론 통제가 심했다는 지적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인수위라는 곳이 워낙 정부 부처들의 로비가 심한 곳 아니냐. 부처 사람들이 인수위 들어와선 꼼짝을 못한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자신들 이해가 얽힌 사안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언론에 정보를 흘리곤 한다. 이런 걸 막으려면 엄격한 보안조치가 불가피했다.”

-법조계 원로로서 박 당선인이 유독 법조인들을 중용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박 당선인에겐 ‘법치 DNA’가 있는 것 같다. 회의 때마다 ‘헌법, 법치, 질서’ 얘기를 한다. 이렇게 법을 좋아하니 법조인 출신이 많이 중용될 것으로 미리 내다봤었다.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전관예우 문제다. 법조인들이 전관예우로 거액을 챙긴다는데 솔직히 요즘 우리나라 어느 분야에서 현직 후배가 전직 선배의 얘길 들어주나. 법조계에선 그런 관행이 없어진 지 오래고, 경제부처 쪽엔 좀 남아 있는 것 같다. 내 경우엔 헌재소장을 마친 뒤 모 로펌에 고문 자리를 얻었지만 정말 작은 액수, 좀 아는 사람들이 알면 놀랄 만큼 작은 액수를 보수로 받았다. 그게 얼마 전 공개됐는데 그런 건 언론이 쓰지도 않더라.”

-최대석 전 외교안보분과 인수위원이 인수위 발족 직후 돌연 사퇴해 궁금증을 일으켰다.
“본인의 사생활이나 돈 문제로 물러난 건 아니다. 하지만 이유가 밝혀지면 본인의 명예와 제3자의 명예, 그리고 국가안보에 해를 끼칠 수 있어 지금 여기선 말할 수 없다.”

-인수위 활동 과정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뭔가.
“내가 인수위를 해보니까 ‘이런 건 내가 직접 해보면 뭔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것들이 보이더라. 하지만 상황(총리직 낙마)이 이렇게 됐는데 굳이 나설 것 있느냐는 생각이 들어 그냥 두었다.”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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