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완 순회특파원 아르헨티나 1신]

중앙일보

입력

일요일인 23일 오후(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치 1번지'로 불리는 대통령궁 앞 5월광장. 며칠 전 소요사태의 흔적은 잔디밭 한 귀퉁이에 돌멩이 몇개로만 남아있다.

비둘기 떼와 더불어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은 이날 오전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임시 대통령이 발표한 채무상환 중단(사실상의 디폴트)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표정들이다.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더불어 산보하는 왈테르 볼리(36)는 "디폴트 선언은 이미 오래 전에 했어야 하는 일"이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진관을 경영해 한달에 1천6백달러를 번다는 그는 "나는 그런 대로 먹고 살 만하지만 최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며 "정치인들이 국민을 속이고 자기네 잇속만 챙기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둘러앉아 벌이는 심각한 토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돈 좀 빌려줬다고 서민들의 고통을 강요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오만과 여기에 줏대없이 끌려다니는 정부가 문제다." 서울에서 온 기자라는 소개에 마치 준비한 것 같은 답변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는 한 젊은이(38)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달 수입이 1천2백달러 정도 됐으나 요즘은 6백달러도 채 못 번다"며 가라앉은 경기상황을 전해줬다. 옆에 있던 친구는 "한국의 외환위기 때도 IMF의 처방이 틀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IMF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냈다.

비둘기 모이를 팔고 있는 마르코스 사라테(53)는 "여기서 8년째 장사를 하고 있지만 요즘같은 불경기는 처음 본다"며 "무능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도 물러났으니 이젠 제발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치안유지를 위해 총과 방탄조끼로 무장한 경찰들이 순찰을 도는 가운데서도 코를 빨갛게 물들인 소녀는 신호대기 중인 승용차에 접근해 동전 몇닢을 얻어내고 만다.

거리에서 만난 한인 교포는 "이민온 지 26년이나 됐지만 요즘처럼 거지들이 많은 것은 처음 본다"며 "실업률과 같은 통계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곳 경제가 얼마나 엉망이 됐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jwjo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