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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신념' 초등생 급훈으로 건 선생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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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 평양 ‘만수대창작사’ 내부에 위치한 비석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강성대국을 위한 투쟁신념이 새겨져 있다(아래). 최모 교사가 자신이 담임을 맡은 학급에 걸어둔 급훈(위)과 비석에 새겨진 문장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 [사진 서울중앙지검]

2011년 인천의 한 초등학교 6학년 학급 교실 입구. 담임인 최모(41) 교사의 증명사진과 이름이 붙은 타원형 접시엔 이 학급의 급훈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오늘에 산다’는 말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 문장은 평양에 위치한 북한 최대 미술 창작단체인 만수대창작사 내 대형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투쟁 신념이다.

 2005년 8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통일위원회는 ‘어린이 민족통일 대행진단’ 행사를 주최했다. 8일 동안 참가했던 한 학생은 행사 직후 인터넷 언론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이 학생은 “미군이 나쁘다는 것을 배웠다. ‘미군을 쏴 죽이자’는 노래는 나의 마음과 같다”고 말했다. 공안 당국은 당시 행사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의 교육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이정회 부장검사)는 21일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을 지낸 박모(52·여)씨 등 전교조 소속 현직 교사 4명을 이적단체 구성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들이 만든 단체는 ‘변혁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교육운동 전국준비위원회(새시대교육운동)’. 전교조 소속 교사들로 구성된 이적단체가 적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 조사 결과 새시대교육운동은 2008년 1월 경북 영주에서 결성된 뒤 전국 13개 지역 대표와 운영위를 두고 18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해 활동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회원들은 매달 5000~2만원가량의 회비를 납부했다. 이들은 단체 결성 후 예비교사 및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등을 상대로 북한의 주의·주장에 동조하는 강의를 두 차례 진행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이들의 활동은 2001년부터 태동했다고 설명했다. 2001년 9월 민주주의민족통일연합이 “광범위한 민족민주주의전선·정당 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통한 연방통일조국을 건설하자”고 결의한 뒤 이들은 교육 부문의 실천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기소된 교사들은 수년간 몇 가지 단체를 함께 만들어 활동했다. 시차는 있지만 모두 전교조 통일위원회에서도 일했다고 한다.

 새시대운동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등 북한 원전을 발췌해 강의안을 만들기도 했다. 또 교류차 방북한 북한에선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선군정치는 정의의 보검’이란 내용이 포함된 연설문 등 북한체제 찬양 문건을 입수해 와 국내에서 배포하기도 했다. 검찰은 이들이 학생·학부모·예비교사·교사 등을 대상으로 ‘청소년 통일캠프’ 등의 각종 행사를 통해 반미·주체사상을 전파하고 북한의 집단주의 교육관을 선전했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기소된 교사들은 전교조 내에서도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으로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전교조 조직을 장악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기소된 박모(44) 교사는 전교조 차원의 남북한 교육 교류 명목으로 26차례나 방북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정원과 경찰은 2009년부터 이 단체의 이적성에 대해 내사를 벌여 오다 지난해 말 이들을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들이 기소됨에 따라 ‘전교조 추방을 위한 범국민운동’ 등 보수단체들의 반전교조 활동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100여 개 단체는 전날(20일) “전교조가 학교를 좌파이념의 정치적 교육장으로 만들었다”며 ‘전교조 추방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출범했다.

 전교조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하병수 전교조 대변인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과잉 충성경쟁의 일환으로 전교조를 타깃 삼아 진행한 표적수사이자 조작수사”라며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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